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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안석의 개혁과 신법

저작시기 2015.10 | 등록일 2018.06.10 한글파일 한컴오피스 (hwp) | 14페이지 | 가격 3,000원

소개글

왕안석은 19세의 젊은 신종 황제가 제위에 오르자, 정치개혁안이 담긴 만언서를 올려 신종의 재가를 얻고 부재상으로 임명된다. 그의 개혁 정책은 1069년~1074년에 걸쳐 시행되었으며, 대상인과 대지주의 횡포를 막아 중소의 농민과 상인을 보호하여 세수를 늘리고, 관료체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가 부국강병책으로 제시한 정책은 청묘법, 균수법과 보갑법으로 다음과 같다.

목차

1. 왕안석의 생애(위키백과 인용)
2. 사마광의 생애(위키백과 인용)
3. 개혁 배경
4. 개혁의 내용
5. 개혁의 결과
6. 왕안석에 대한 평가
7. 마치면서
8. 참고문헌

본문내용

§. 개혁의 결과
➀ 사마광 등 보수파(=구법당) 관료와 대지주 그리고 상인들의 집단 반발이 있었음.
- 신법의 대부분이 기득권 세력들에게 다량의 세금을 징수하는 내용들이 많아서 반발함.

대대적이 개혁이 단행되자 조정 내외에서 격렬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특히 개혁이 그토록 전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의견 수렴과 논의 과정이 없이 시행되었던 점이 문제였다. 왕안석 자신의 독선적인 성격도 큰 반발도 야기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왕안석의 개혁에 동조하는 인원은 점차 줄어들고 중진 관료들은 거의 대부분 반대파로 돌아섰다. 한기와 문언박·구양수·사마광·소식·소철·정호·정이 등 명망 있는 관료들은 모두 왕안석의 신법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아틀라스 중국사>

송 철종(1085~1110)의 시기
⇒ 10세에 즉위한 철종을 대신하여 祖母 선인태후(宣仁太后)가 대리정치를 시작함. 선인태후는 인심 안정의 명분으로 대부분의 신법을 폐기하고 구법 시대의 상태로 되돌리고 구법당 관료들을 재등용함. 이후 구법당 안에서 파쟁이 일어나 대략 세 개 정도의 분파가 생겨 서로 격한 대립으로 치달았음.

⇒ 8년 후인 1093년, 선인태후가 죽고 철종의 친정체제가 시작되었음. 철종은 구법당을 모조리 몰아내고 신법당 관료들을 불러들였음. 신법당 관료들은 구법당 관료들을 조사하여 대대적인 보복을 가하였음.

⇒ 이후 신종의 비(妃) 상태후가 구법당과 신법당을 동시에 등용하는 정치를 실시하였으나 이미 구법당과 신법당의 대립은 회복 불능의 단계로 결국 실패가 되었음.

② 사회 모순이 심각 → 방랍의 난과 송강의 난
- 방랍의 난
→ 목주지방은 칠·딱·솔·삼나무 등의 생산으로 풍족한 생활을 한 곳으로, 방랍도 원래 칠원(漆園)의 경영자. 휘종(徽宗) 말년에 재상 채경이 궁정 장식품의 제작과 궁전 조영을 위한 목재의 매상, 정원 배치를 위한 죽석화목(竹石花木)의 채취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농민을 이들의 수송에 동원시키고, 또 수탈을 강행하면서 백성의 생업을 크게 압박하여 괴롭혔음.

참고 자료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2009
신성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이춘식, 『중국사서설』, 교보문고, 2005
박한제·김형종 외 3명 저, 변용익 역, 『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 2007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편, 『강좌중국사 Ⅲ』, 지식산업사, 1989.
안병우 외 8인,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주)천재교육, 2014
신채식, 「왕안석 개혁의 성격 검토 ; 특히 신법의 보수성에 관하여」『동양사학연구』51, 1995.
신채식, 『송대관료제연구』, 삼영사, 2008
임종욱, 『중국 역대 인명 사전』, 이회문화사, 2010
신성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Daum 블로그 http://blog.daum.net/jaol21/6918123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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