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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과 김춘추

저작시기 2013.01 |등록일 2018.04.11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5페이지 | 가격 1,500원

목차

1. 김춘추
2. 연개소문
3. 연개소문과 김춘추의 만남
4. 그 두 사람의 정치적 상황
5. 연개소문과 김춘추 그리고 ‘하나의 중국’
6. 연개소문과 김춘추에 대한 견해

본문내용

1. 김춘추
김춘추는 7세기기 막 열리던 602년에 태어났습니다. 정북군주 진흥왕을 증조부로 두었지만, 조부인 진지왕이 정치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귀족들에 의해 폐위된 뒤 그의 집안은 여러 진골귀족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특히 진지왕을 이은 진평왕대에 왕실 내부의 특정 가계의 의해 성골 관념이 강화되면서 이들과 구별되는 방계왕족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진평왕이 50여 년 간 재위하면서 중앙집권체제를 재정비하여, 김춘추가 정치활동을 개시하였을 620년경에는 그 골격이 계속 다져지고 있었습니다. 진평왕으로서도 여러 세력으로 분열된 진골귀족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김춘추 집안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김춘추의 아버지 용춘이 진평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고, 왕실 업무를 총괄하는 내성사진에 임명되는 등 왕실 구성원으로서의 위상을 조금씩 회복하였습니다. 또한 김춘추 집안은 금관가야의 후손인 김유신 집안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김춘추의 결혼은 이러한 친분의 일차적 결실이자 이를 더욱 굳힌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덕여왕 곧 여왕이 즉위함으로써 신라의 정치상환은 다시 유동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왕권에 제동을 걸려는 귀족들의 움직임이 재연된 것입니다. 진평왕 말년인 631년에 일어난 칠숙, 석품의 난은 이를 예고하는 첫 신호탄이었습니다. 이에 김춘추는 김유신과 정치적 결속을 다지면서 문희와의 야합을 추인받을 정도로 선덕여왕과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골귀족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김춘추는 일생 최대의 시련을 맞게 됩니다. 642년 여름 백제에게 대야성(경남 합천)등 40여 성을 함락당할 때 딸과 사위가 몰살당했습니다. 이일로 김춘추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신라로서도 연일 계속되는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 속에서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김춘추의 평양행은 이러한 상황에서 결행되었습니다. 즉 자신의 정치적 추락에 대한 불안감과 국가안위에 대한 근심을 안고 적국의 수도를 찾았던 것입니다.

참고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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