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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유태인과 인천 화교를 통해 본 이주민의 삶과 의의

저작시기 2017.04 |등록일 2017.04.08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6페이지 | 가격 1,300원

목차

1. 주제 선정의 동기

2. 논문 요약
1)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김승욱-
2) 유태인의 만주 이산과 삶 -윤휘탁-

3. 감상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주제 선정의 동기
최근 전 세계적으로 난민 문제가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많은 국가들이 난민 수용에 대한 우려와 반발을 나타내고 있는데, 테러에 대한 우려와 새로운 이주민들에 의한 경제적 침탈 등이 주된 원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주민과의 교류는 새로운 문화 혼융과 경제 발달의 이점들을 가져다주기도 하였는데, 중국 경제 발전의 역사를 중원에서 강남으로의 중심 이동이라고 하는 만큼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의 교류는 새로운 개발의 도화선이 되는 것이다. 이주 집단의 형성이 가져오는 경제, 문화적 발달과 원주민들과의 마찰의 사례는 20세기 만주와 인천에서도 면모를 찾을 수 있다. 만주 중에서도 하얼빈은 러시아계 유대인들의 새로운 정착지가 되었고, 유대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국제도시로서 발돋움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의 갈등 또한 근대의 사례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특히 인천에서는 화교들과 조선인들의 노동력 경쟁과 배타적 민족주의에서 비롯한 마찰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이주민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더 많은 난민과 이주민 문제에 대한 작은 해답들을 얻는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편의 논문을 다 읽은 후에 들었던 또 하나의 호기심은 인천의 화교들은 원주민과의 마찰과 정부의 억압적 정책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존속하여 한반도 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반면, 만주 하얼빈의 유대인들은 결국 새로운 둥지를 찾아 다시 한 번 이산의 길을 떠나야 했는가? 였다.
따라서 논문에 대한 감상 부분에서는 인천 화교들이 어떻게 해서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반면, 유대인들은 새로운 이산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고찰해보기로 하였다.

2. 논문 요약
1)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김승욱-
근대적 의미에 있어 화교의 이주는 19세기 말에 시작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개입하기 시작하였고, 확장된 세력을 바탕으로 많은 화교들이 조선 사회에 진출하였다.

참고 자료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 연구집 47, 2010
윤휘탁, 유태인의 만주 이산과 삶, 중국근현대사연구집 54, 2012
이창호, 한국 화교(華僑)의 사회적 공간과 장소: 인천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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