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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 1992년 사건 10가지

저작시기 2011.12 |등록일 2017.04.01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가격 1,500원

목차

1. 일본대사관 앞에서 첫 수요시위 시작(1992년 1월8일)
2. 미국에서 LA 흑인 폭동(1992년 4월 29일~1992년 5월 4일)
3. 기후변화협약 체결(1992년 6월 14일)
4. 서울에서 신행주대교 붕괴 사건(1992년 7월 31일)
5. 세계의 왼손잡이의 날 재정(1992년 8월 13일)
6. 대한민국과 중국 수교(1992년 8월 24일)
7. 영국의 ‘검은 수요일’(1992년 9월 16일)
8. 교육부의 6차 교육과정 개정속의 뉴라이트(1992년 10월)
9. 초원복집 사건(1992년 12월 11일)
10. 14대 김영삼 당선과 노테우의 뒷돈(1992년 12월 19일)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일본대사관 앞에서 첫 수요시위 시작(1992년 1월8일)
- 배경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둔 1992년 1월8일이었다. 이날 정대협 회원 30여명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종군위안부 강제연행 인정과 희생자에 대한 손해배상' 등 6개항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 경과
1992년 1월24일 외무부 내에 '정대협 실무대책반'을 만들어 정부 부처가 문서자료를 조사하고 내무부와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정신대 피해자 신고'를 받았다. 그 사이 정대협은 대부분의 피해 여성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점을 감안, 1993년 생활안정지원법 제정을 촉구해 피해자들에게 임대아파트를 제공하고 일본 전범에 대한 출입국금지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시련도 적지 않았다. 대사관 주변 100m 이내에서는 집회를 열 수 없다는 법 때문에 집회 때마다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게 예사였고 외교적으로 민감한 시기엔 집회가 원천봉쇄 될 뻔한 적도 있다.

- 결과; 그동안의 수요시위에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온 유치원생부터 독립군으로 활약했던 할아버지, 일본인, 세계 각국의 인권단체 회원들 등 나이와 국적을 불문한 수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수요시위는 해를 거듭하면서 광복절과 세계여성의 날 등의 기념일에는 세계 연대 집회로 진행돼 각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외치기도 했다.

수요시위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대내외적으로 알린 결과 2007년 미국 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됐다. 이후 각국 의회와 일본, 한국 등 지방의회에서도 결의안 채택이 이어지고 있다. 국제 인권기구와의 연대 또한 강화돼 일본이 저지른 위안부 강제연행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 여론을 환기시키는 성과도 이어졌다.

- 의의
1992년 당시만 해도 일본 총리의 방한에 즈음한 일회성 행사로 여겨졌으나 이후 횟수를 늘려가면서 일본 정부에 대한 민간 차원의 대표적 '반일집회'로 자리 잡았다.

참고 자료

《경향신문(1992.12.16)》
《경향신문(2011.8.12)》
《경향신문(2011.9.15)》
《연합뉴스(2011.12.14)》
《투데이 코리아(2011.8.10)》
《한국일보(2011.9.22)》
《위키백과사전》
노태우, 2011 『노태우 회고록』 조선뉴스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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