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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본 십자군 전쟁

저작시기 2015.12 |등록일 2015.12.24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8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1. 머리말

2. 제1차 십자군

3. 제2,3차 십자군

4. 그 이후의 십자군
4.1. 제4차 십자군
4.2. 제5,6,7,8차 십자군

5.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십자군 전쟁 전후 유럽의 종교가 기독교였다. 사실 중세 유럽이 기독교적 통일사회였다는 것은 명실상부한 사실이다. 로마, 파리, 쾰른, 이스탄불 등 유럽의 모든 도시의 거대한 교회들은 물론 베네딕투스계와 아우구스티누스계 수도원, 그리고 13세기에 등장했지만 프란체스크-도미니쿠스게 수도원들이 유럽 도처에 존재했다는 사실 또한 중세 유럽이 의심할 여지없는 기독교 사회였음을 말해준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 서유럽의 상황은 제도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리 잡히면서, 점차 인구가 늘고, 경제적으로는 어려워지는 상황이었다. 또한 서유럽 내부에서는 갈등과 크고 작은 싸움이 자주 일어났으며, 영주와 기사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권력과 경제력의 기반이 되는 영토를 두고 크고 작은 내분들이 잦았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성적서임권을 두고 교황과 황제 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비록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교황권이 황제권보다 우위에 있음을 알렸지만 교황은 자신의 권력을 조금 더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1095년 동방의 황제였던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일이었다. 당시 알렉시우스는 이슬람 세력에게 예루살렘과 안티오크와 에데사를 빼앗기고 자신의 권좌마저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서방으로부터 얼마간 군사적인 원조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서방은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수중에서 되찾을 목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십자군을 파병하였다.
3세기부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생애를 보냈던 지역을 방문해왔다. 이 당시 순례자 중의 하나였던 성 헬레나는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라고 믿었던 것을 발견했고 그녀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곳에 성묘교회를 세웠다. 이후부터 서유럽의 기독교 신자들은 이 곳 예루살렘을 성지로 여기고 많은 순례자들이 다녀갔다.
서유럽의 교황은 동방의 황제의 도움 요청과 예루살렘의 성지순례를 방해 받고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예루살렘을 되찾아 성지순례를 하는 순례자들이 박해 받지 않고 순례를 할 수 있도록 십자군 원정을 해야 한다고 연설을 함으로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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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욱, 2011, 『십자군 이야기=Story of the crusades.2』,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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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1991,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 아니 "한 손에 칼, 한 손에 십자가"」,
『아침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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