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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생애와 정치사상

저작시기 2015.12 |등록일 2015.12.03 워드파일MS 워드 (doc) | 12페이지 | 가격 1,200원

목차

1. 조광조의 생애

2. 성리학의 이상을 실천한 개혁 정책
(1) 조광조의 정치사상 - 지치주의 至治主義
(2) 훈구와 사림 대립의 시발점 - 현량과 賢良科
(3) 중종과 조광조의 대립 -소격서 昭格署 폐지
(4) 훈구파에 대한 공세 - 위훈삭제 그러나..

3. 훈구파의 반격

4. 조광조 사후 그가 남긴 것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조광조의 생애
향년 38세.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조광조는 17세 되던 해에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 조원강을 따라가 평안도 희천에 귀양가 있던 김굉필(金宏弼∼1504)에게 수학(受學)할 기회를 얻었다. 김굉필은 고려말 정몽주와 길재를 거쳐 김종직을 계승한 영남 사림파의 핵심인물로 1498년의 무오사화로 유배당해 있었다. 영남과 서울을 기반으로 하여 전혀 이루어지지 못할 것 같았던 만남, 그러나 무오사화라는 정치적 사건은 이 둘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 만남은 개국공신의 후예 조광조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만큼 운명적인 것이었다. 영남 사림파의 학맥이 기호 사림파에 접목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다.
조광조는 어려서부터 행실이 바르고 아이답지 않게 근엄하며 남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엄격성을 보였다. 보통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뜻을 높이 세우고 학문에 열중하는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미친사람(狂人)’이라거나 ‘화의 태반(禍胎)’이라고 할 정도였다.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으로 친구들과의 교우관계도 끊어질 정도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항상 의관을 단정히 하고 언행에 절제가 있어 품행이 방정 하다는 말이 꼭 들어맞았다. 어린 시절 보였던 자신에 대한 철저함은 훗날 정치적으로도 엄격한 원칙주의자의 길을 걸어가는 바탕이 되었다.
중종 5년(1510)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당)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감찰·정언·수찬·교리·전한 등을 역임하고, 경연(신하들이 임금에게 경전을 가르치고,토론하는 세미나)에서 중종을 가르쳤다. 이때 중종에게 소학을 추천했다.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참고 자료

조광조: 실천적 지식인의 삶,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정두희 아카넷, 2000
정암 조광조의 지치사상연구 金鍾敏 학위논문(석사) 고려대학교
조선시대 7인의 정치사상: 정도전ㆍ조광조ㆍ이황ㆍ이이ㆍ정약용ㆍ이항로ㆍ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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