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입력폼

고려시대 부곡제 주민들의 신분적 규정 : 실질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저작시기 2013.11 |등록일 2014.12.08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5페이지 | 가격 500원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부곡제 주민의 양인설
2. 부곡제 주민들을 향한 국가의 인식
3. 부곡제 주민들의 사회적 한계점

Ⅲ. 결론

본문내용

고려시대의 지방제도는 군현제라고 칭한다. 이것은 중앙집권적 지방통치를 위해 구획한 행정구역제도를 말하거니와, 지방관의 파견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고려는 이와 같은 군현조직과는 별도로 향, 부곡, 소 등의 특수 지방행정단위를 두고 있었다. 이를 합하여 부곡제 지역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부곡제 지역은 전정이나 호구가 적어 현으로 만들 수 없는 곳에 설치된 곳으로 이해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전쟁포로의 집단적 수용지 혹은 반역 및 적에게 투항하는 등의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군현에서 격이 떨어지는 것 같은 예외적인 경우도 존재하였다.

<중 략>

부곡제 주민의 양인설의 근거가 되는 것 중에 한 가지는 이들이 공과, 공역을 부담했다는 것이다. 양인신분의 사람들은 모두 국가에 대하여 공부, 요역, 군역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공부는 공물을 바치는 것이었는데, 이는 지역에서 나는 토산물을 바치는 것이었으며 요역은 궁궐, 사찰, 관아의 축조 등에 필요한 노동력을 수취하는 것이었으며 군역은 군사적인 업무인 국방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공과, 공역을 부담한다는 것은 고려시대의 양인임을 보여주는 의무 중에 하나였다. 이들과 노비를 의미하는 천인은 기본적으로 모두 주인의 사유재산으로서 물질과 같은 취급을 받는 존재였으며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역을 부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천인과 다르게 부곡제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공부, 요역, 군역의 의무를 국가에 지고 있었다. 또한 토지를 소유한 자는 국가에 전세를 물었다.

<중 략>

이러한 단순한 인식적인 차원을 넘어서 부곡제 주민들은 명백히 법제상으로 많은 차별을 받았다. 앞서 설명했던 천인설의 근거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국학에의 입학이 금지되었고, 형벌상 노비와 동등하게 취급되었으며, 자손의 귀속문제에 있어서 천인의 대우를 받았고, 과거에의 응시 금지 및 승려가 되는 것의 금지 등의 여러 가지 제약이 뒤따랐다.
첫 번째로, 국학은 고려가 고위관리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국립대학이었다. 국학은 크게 유학부와 기술학부로 나뉘어있었는데 일반적으로 귀족집안의 자제는 유학부에 입학하였고 양민집안의 자제는 기술학부에 입학하였다.

참고 자료

채웅석 『고려사 형법지 역주』(신서원 200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5 :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탐구당문화사 1995)
박종기 『고려의 부곡인, <경게인>으로 살다』 (푸른역사 2012)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입문 ② : 중세편』 (풀빛 1995)
박종기 『고려시대 부곡제연구』(서울대학교출판사 1990)
박용운 『고려시대사』(일지사 201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국역 고려사』(경인문화사 2011)
구산우, “고려시기 부곡제의 연구성과와 과제”, 부대사학 12 (1988)
다운로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