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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와 환향녀의 개념

저작시기 2014.10 |등록일 2014.10.08 한글파일한글 (hwp) | 10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1. 공녀
1-1. 공녀의 정의
1-2. 원의 대한 공녀(고려시대)
1-3. 명의 대한 공녀(조선 전기)
1-4. 청의 대한 공녀(조선 후기)
1-5. 기황후
1-6. 고자의 헌납

2. 환향녀
2-1. 환향녀의 정의
2-2. 환향녀의 대우
2-3. 일본의 의한 종군위안부
2-4. 이라크판 환향녀

본문내용

1-1. 공녀[貢女]의 정의
원(元), 명(明), 청(淸) 나라의 요구에 따라 조선왕조가 조공품으로 바치던 여자
고려가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족을 평정할 때 몽고의 지원을 받으면서 서로 관계를 갖게 된 이후. 몽고는 고려에게 계속 압력을 가하고 과다한 공물을 요구하여 왔다.
이러한 때 몽고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피살되자 두 나라의 국교는 단절되었고 1231년 (고종 18)년부터 1258년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몽고의 고려 침입이 여러차례 게속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몽고를 완전히 격퇴할 수는 없었지만 군사적으로도 굴복하지 않아 두 나라 사이에는 화평의 교섭이 진행되고 고려는 몽고의 부마국(鮒馬國)으로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몽고는 화평의 조건으로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500명 내지 1000명을 요구하였고 고려가 몽고에 항복한 후에도 여러 구실로 많은 수의 공녀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의 표면적 이유는 중국대륙을 통합하여 원나라를 세운 후 항복해 온 많은 군사들에게 배우자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고려 여자에 대한 야욕의 충족과 고려를 무기력하게 하여는 술책이 숨어 있었다. 고려에서는 <결혼도감(結婚圖鑑)>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등 특별 관청을 설치하여 여자를 징발하였고. 1275년(충렬왕 1)부터 공민왕 초기에 이르기까지 원나라로 보낸 처녀진공사(處女進貢使)의 왕래 횟수는 50회 이상에 이르렀다. 몽고족을 야만족으로 보는 고려 여자들은 이에 응하지 않아 역적의 부인이나 파계한 승려의 딸로 충당하는 일도 있었고, 충렬왕 때는 온 나라 안에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처녀등록제를 실시하였다. 공녀는 주로 13~16세까지의 처녀를 대상으로 징발하였으므로 이 연령의 처녀를 가진 집안에서는 금혼령이 내리기 전에 미리 혼인시킴으로서 10세가 되면 혼인시키는 조혼(早婚)의 풍습과 데릴사위 등의 관습이 생기게 되었다. 한편 미리혼인하지 못한 처녀 중에서는 원나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중이 되거나 목숨을 끊는 등 그 폐단이 많았다.

참고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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