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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서의 원균

저작시기 2013.08 |등록일 2014.09.25 한글파일한글 (hwp) | 5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1. 머리말
2. 맺음말

본문내용

1540(중종 35)∼1597(선조3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고려 태조 때의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병부령 극유(克猷)의 후손이다.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르는 데 공이 컸으므로, 부령부사로 특진되었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겨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하는 데도 공을 세웠으며, 1592년(선조 25)에는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그해 4월 13일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양국간의 전쟁준비 격차로 말미암아 개전초부터 일방적인 패주의 연속이었으며, 거진(巨鎭)의 명관들은 다투어 도주하고, 백성들은 모두 산간으로 피난하여 성읍이 모두 텅 빈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 제일의 요충인 경상좌수영의 군사는 수사 박홍(朴泓)이하 전장병이 도주하여 싸워보지도 못하고 완전 궤멸되었으며, 우수영 관할하의 장병들도 거의 흩어져 휘하에는 약간의 장병만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조정과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고군분투하였다.
몇 차례에 걸친 원병요청 끝에 마침내 이순신의 원병이 도착하자 합세하여 옥포(玉浦)·당포(唐浦) 등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이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군을 이겨야 한다는 각오 아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중인 것을 모르고, 조정의 무리한 명령에 따라 삼도수군을 이끌고 부산의 적을 공격하던 중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대패하여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1604년 이순신·권율(權慄)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1등으로 책록되어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원릉군(原陵君)에 추봉되었다.
1605년 왕이 내린 치제문과 숙종 때의 대사헌 김간(金幹)이 찬한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 統制使元均贈左贊成公行狀〉이 있다.
그러나 후일 이순신이 민족의 영웅으로 각광을 받은 것과는 달리 대표적인 겁장이로 기록되어오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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