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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 10.19 사건, 보성 지역을 중심으로

저작시기 2013.11 |등록일 2014.09.25 한글파일한글 (hwp) | 14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Ⅰ. 머리말

Ⅱ. 해방 후 보성의 정치와 사회

Ⅲ. 전개과정
1) 제14연대 반군의 보성 지역 점령
2) 정부 측의 보성 지역 진압작전(1948.10.21.~10.30.)
3) 진압 이후 군경의 보성 지역 토벌(1948.11.~1949.12.)

Ⅳ. 민간인 학살의 실태와 영향

Ⅴ.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1948년 10월 19일 저녁,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제주도 봉기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였다. 제14연대 하사관 그룹은 제주도로 파병되어 동족을 죽일 수는 없다며 총구를 이승만 정권으로 돌렸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신생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지 두 달이 지났을 때였다. 제14연대 하사관들이 주도한 봉기는 금새 일반 장병들의 동의를 얻어, 다음날인 10월 20일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고 지역 좌익세력과 민중이 가담하여 곧이어 전남 동부지역 수 개 군으로 번져 나갔다. 이것이 이른바 여순사건이다.

<중 략>

정부가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해 1948년 10월 19일 오전 7시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 출동 명령을 하달하자, 이에 반대하는 소속 군인 약 2,000여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10월 20일 새벽 5시경, 여수 시내로 진입하여 좌익단체의 인도에 따라 군청, 시청, 관공서, 은행, 신문사 등 중요기관을 점령하였다. 곧 9시경 여수의 전 시가지는 봉기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봉기군들은 좌익 청년단체들의 선도로 피신한 경찰, 우익요인, 우익청년단 등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이어 봉기군의 주력부대는 봉기의 확산을 위하여 순천으로 출발하였고, 오후 3시경 봉기군에 완전 점령되었다.

<중 략>

제14연대 반란사건 이후 1948년 11월 1일 기준 전남도 보건후생국 통계에 따르면 보성지역에서는 인명 피해 사망 80명, 중상 31명, 행방불명 7명(총 148명)으로 집계되었고, 이 중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46명, 15명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신청인 조사 위주로 진행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과정에서 밝혀진 신청인 및 참고인 진술을 종합해보면 보성지역 여순사건 관련 군경에 의한 희생자 수는 최소 대략 150~200여명으로 추산되고, 다수의 미신청인이 존재하며 진실화해위언회가 파악하지 못한 희생사건이 다수 존재할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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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군사」,1995, 고흥향토사 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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