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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저작시기 2013.08 |등록일 2014.09.25 | 최종수정일 2014.11.20 한글파일한글 (hwp) | 14페이지 | 가격 1,500원

목차

Ⅰ. 머리말

Ⅱ. 진도에서의 대몽항쟁
1. 삼별초의 진도 입도 배경
2. 진도에서의 해상항전

Ⅲ. 제주도에서 대몽항쟁
1. 진도정부의 붕괴와 제주도로 이동
2. 제주도에서의 해상항전
3. 오키나와로 이동

Ⅳ.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중에서 진도와 제주도에서의 대몽항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는 918년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세운 왕조이다. 대몽항쟁은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피살된 후 고종 18년(1231년)부터 시작되어 원종 14년(1273년) 제주도 삼별초 정부가 함락될 때까지 42년간 기나긴 대외항쟁이다.
삼별초는 1219년(고종 6) 최충헌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가 방도 등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초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이후 부대가 증가하면서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고 다시 신의군 조직과 합쳐지면서 삼별초가 되었다.

<중 략>

삼별초의 진도에서의 활동은 원종 11년(1270년) 8월 19일부터 원종 12년(1271년) 5월 15일까지 약 9개월 동안 해당된다.
삼별초군은 1270년 8월 19일 이들의 종착지인 진도에 도착하였다. 삼별초군은 진도에 들어오면서 당시 읍성인 용장성을 서울로 삼고 제반 시설을 갖추어 나갔다. 이곳에는 지방 관아와 용장사라는 절이 있어 삼별초군은 이들 건물들을 사용하면서 궁성 및 관청 건물들을 빠른 시일 내에 축조하였다. 그러면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도성의 위용을 갖추기 위하여 용장산성 축조에 착수하였다. 이 성은 주봉인 선황봉을 기점으로 주위의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상당한 규모의 석성으로 이를 완성 하는데 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중 략>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패망한 후에 오키나와로 갔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슈리성, 우레소에 구스쿠 등 10여개의 유적에서 고려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고려와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기와는 癸酉年高麗瓦匠造, 大天 등의 글자가 적힌 명문화,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 출토된 연화문 와당 등이다.
계유년고려와장조는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제작자가 만든것”이라는 뜻으로 이 기와는 일본인이 만든것이 아니라 고려인이 만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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