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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건국 기 서남해 해상세력의 역활

저작시기 2013.08 |등록일 2014.09.25 한글파일한글 (hwp) | 11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1. 머리말
2.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시대상황
3. 서남해 해상세력의 성장과 왕건과의 결합
4. 후삼국통일과 서남해 해상세력의 역할
5.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태조 왕건이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의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라는 새로운 통일된 왕조를 확립함은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후삼국의 분립기가 매우 심각한 민족분열의 시기였으며, 그것을 극복하고 왕건이 한반도를 재통일한 이래로 우리민족이 단일한 국가, 단일한 문화, 단일한 역사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더욱 자명해진다.
나말여초의 왕조교체기에 있어서 정치․사회적 변동을 주도한 세력은 호족이었다. 그 중에서 서남해 일대의 호족세력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였다. 견훤에 비해 늦게 출발하였고 군사적으로도 열세에 놓여 있었던 왕건이 견훤을 누르고 후삼국을 통일한 요인 중의 하나도 바로 서남해 일대의 호족세력들이 왕건에게 협력하였기 때문이었다.

<중 략>

서남해 해상세력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 말기부터이다.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이 지역은 문화 교류는 물론 경제와 정치의 중심지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남해 일대가 신라의 중앙에까지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장보고는 흥덕왕3년(828)에 당나라에서 돌아와 왕에게 요청하여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이후 청해진은 해상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장보고는 주로 영산강 유역의 서남해안 일대의 지방인들을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신라의 중앙정계에까지 진출하는 대 세력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당나라와 독자적으로 교류를 하는 등 정치적으로나 경제적․군사적으로 신라의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세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841년 장보고가 암살되고, 이어 851년에 청해진이 혁파되어 그곳 주민들을 벽골군(김제)으로 집단 이주시킴으로서 청해진은 몰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대의 군소 해상세력들은 각지에서 활동하면서 나름대로 잔존하였다. 50여 년 후인 진성여왕 대에 이르면 신라정부의 지방통제가 약화되면서 서남해일대의 지방 세력들이 호족으로 성장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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