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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냉수리비의 내용검토

저작시기 2014.05 |등록일 2014.08.16 | 최종수정일 2016.09.26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9페이지 | 가격 2,500원

소개글

영일냉수리비의 비문해독을 통해 내용을 검토하고, 영일냉수리비에 나타나는 財의 성격을 파악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영일 냉수리비의 내용과 발견

Ⅲ. 입비연대

Ⅳ. 財의 성격
1. 재물설
2. 광산설
3. 토지설

Ⅴ. 맺음말

본문내용

영일냉수리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 혹은 영일냉수리비는, 1989년 4월 2일, 경북 영일군(현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 563번지의 밭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신광면사무소에 보관되고 있으며, 국보 264호로 지정되었다. 발견 당시 가장 오래된 신라비로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 비문은 화강암의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특이하게도, 앞면과 뒷면, 상면의 3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기는 폭 70cm, 높이 60cm, 두께 30cm다. 글자는 앞면에 12행 152자, 뒷면에 7행 59자, 윗면에 5행 20자를 새겼다. 모든 글자를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다.
1989년 4월 3일, 모산(慕山)학술조사단이 현지에 가서 탁본과 촬영을 하여 석문(釋文)에 노력을 기울였다. 심재완씨에게 독점되고 있던 것을, 4월 12일, 경상북도 문화재계의 항의에 따라 발견신고가 이뤄지면서, 그날 오후 道조사단에 의해 조사가 시행되었다.
한국고대사연구회에 의해, 비문연대, 財, 葛文王, 신라 중고기 재산상속문제 등 다양한 시각에서의 발표와 토론이 7월 6~7일 동안 이루어졌다.

<중 략>

냉수리비에는 외위(外位)명, 부(部)의 명칭, 전사인, 도사(道使), 갈문왕 등과 같은 다양한 명칭이 나타난다. 그리고 재(財)를 둘러싼 분쟁, 칠왕등이 모여 공론하는 판결을 내리는 정치체제, 후속조치 이후 소를 잡아 고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정치·사회·경제를 아우르는 당시의 사회현상들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사료로써의 가치를 부정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포괄하는 사안들이 많아, 그 모든 것을 다루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이번 발제에서는 그 내용을 분석하는 데에 중점을 두어 각 문제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는 정도로 마쳤다. 특히 상대등, 갈문왕의 지위와 권리에 대해서는, 학계의 다양한 의견이 있음에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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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석, 1987, 「고대삼국의 왕호와 사회」 『韓國古代社會史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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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호, 1990, 「迎日冷水里新羅碑의 建立 年代」 『한국고대사연구』 3.
안병우, 「迎日冷水里新羅碑의 5~6세기 新羅의 社會經濟相」 『한국고대사연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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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관, 1990, 「迎日 冷水里碑에 보이는 至都盧葛文王에 대한 몇 가지 問題」 『한국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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