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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리 전투

저작시기 2013.04 |등록일 2014.06.27 | 최종수정일 2017.06.19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6페이지 | 가격 1,700원

소개글

6.25 전쟁 간 발발하였던 지평리 전투입니다.

목차

Ⅰ. 지평리전투의 개요
Ⅱ. 지평리전투의 전개
Ⅲ. 지평리전투의 의의
Ⅳ. 느낀점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지평리전투는 6·25 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이 1951년 2월 세번째의 큰 공세를 개시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전선을 밀어 내려오고 있을 때,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국 2 보병사단 23연대전투단(RCT)과 23RCT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국 인민해방군 39군과 3일간 벌인 격전이었다.
1950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1.4 후퇴와 장진호 전투로 대표되는 참담한 후퇴를 겪어야 했던 유엔군은 평택-원주-삼척 선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1951년 2월부터 반격에 들어갔다. 썬더볼트 작전, 라운드업 작전, 킬러 작전, 리퍼 작전, 러기드 작전 그리고 돈틀리스 작전 등으로 진행된 반격 작전은 이전과 달리 산악 지형을 이용한 중국군의 우회 및 포위 섬멸 전술을 염두에 두고 종방향으로 진격이 아닌 횡방향의 연결을 중요시하여 한 번에 최대한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인접 부대의 진격 속도에 맞추어 모든 전선에서 천천히 진격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중 략>

이처럼 중공군과 미 23연대와의 지평리에서의 치열한 전투는 2월 15일 아침까지 계속됐다. 전투과정에서 중공군의 계속적인 공격에 연대장 프리먼 대령은 예비로 확보해 뒀던 돌격중대까지 투입하며, 적과 똑같이 함성을 지르고, 수류탄을 던지고, 총검으로 맞서며 공격해 오는 적이 질릴 정도로 용감하게 싸웠다.
이때 연대장 프리먼은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며 끝까지 부하들과 함께 싸우며 승리를 쟁취했다.
전투 간 미8군사령관은 지평리 상황을 주시하며 공군과 보급품을 지원했다. 특히 14일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미9군단의 예비인 크롬베즈의 5기병연대를 주축으로 한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를 편성, 지평리에 투입했다. 크롬베즈부대는 15일 아침 항공지원하에 공격을 개시했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출이 어렵게 되자, 병력 160명으로 구성된 1개 보병중대와 전차 23대로 공격조를 재편성해 다시 공격했다. 결국 크롬베즈가 지휘하는 공격조는 중공군의 무차별 공격 속에서 15일 17시쯤 드디어 미23연대와 연결했다.

참고 자료

유용원의 군사세계
경기문화재단 문화포털
국방부 6·25전쟁 제60주년 사업단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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