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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관계와 임진왜란

저작시기 2013.09 |등록일 2014.06.06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2페이지 | 가격 1,500원

목차

Ⅰ. 서론
Ⅱ. 임진왜란 이전 조일관계
Ⅲ. 임진왜란 중 조일관계
Ⅳ. 임진왜란 이후 조일관계
Ⅴ. 논평 및 결론
*참고논저

본문내용

Ⅰ. 서론
조선과 일본은 명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고 중국에 종속된 국가였다. 두 국가는 교린 관계를 성립한 이후에 대체적으로 평화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특히 조선의 경우는 왜구금압과 피로인 송환을 위해 사절을 파견했다. 표면적으로는 서로를 대등하다 여겼지만, 실상은 달랐다. 조선은 문화적 우월하다 생각하였고, 일본은 일본 우위인식과 함께 조선과의 정식 외교 성립을 통한 막부장군의 권력 강화, 중국의 선진문화 흡수, 어려운 경제사정 타파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대마도는 사실상 양국 외교의 구심점이자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었는데, 국가 대 국가로 외교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므로 후기에 이르러 모순점을 드러낸다. 가장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그들과의 첫 '만남'은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그 이후의 모습이 어떻게 융화되고 변질되었는지 살펴보겠다.

Ⅱ. 임진왜란 이전 조일관계
[1]. 조선의 외교정책
1. 사대교린 사대는 중국, 교린은 왜국 및 여진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조선 개국 이래 외교방침이었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며 우호 관계를 유지했는데, 일본각지의 사신들은 조선을 상국(임금의 나라)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점 때문에 조선은 일본 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2. 왜 구
조선건국 이래 일본과의 관계에서 가장 큰 현안은 '왜구문제'였다. 왜구의 구성원은 쓰시마, 이끼, 마쓰우라, 세토나이카이 출신의 부랑자와 무장 상인들로 조선과 중국 연안에서 사무역을 꾀하거나 약탈, 백성납치를 일삼았다. 조선의 왜구 대책은 크게 '외교적 교섭', '실력행사', '경제적 회유' 등으로 나타났다. *외교적 교섭: 1392년 승려 가쿠쓰이를 아시카가 막부에 보내 '왜구 금압'을 요청. *회유: 본인들에게 '무역 허가증'인 도서를 제공. → 조선 초기 정부는 각 계 각층의 일본인들과 다원적인 통교체제를 유지하면서 왜구 문제 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1419년(세종1) 쓰시마 출신 왜구 선단이 충청도와 황해도 일대를 침범한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은 '실력행사'에 나섰다.

참고 자료

한국사 연구회 편,『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상)』, 지식산업사, 2008
한일관계사학회 편,『한일관계2천년 보이는역사, 보이지 않는 역사 근세』, 경인문화사, 2006
한일관계사학회 편,『교린제성』, 국학자료원, 2001
김현우,『임진왜란의흔적 (부산, 경남)』, 한국학술정보(주)
요시노 마코토, 『동아사이 속의 한일2천년사』, 책과 함께, 은 2005, 이진희, 강재언, 『한일교류사』, 학고재, 1998
역사교과서 연구회(한국), 역사교육 연구회(일본),『한일 교류의 역사』, 혜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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