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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 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저작시기 2013.05 |등록일 2013.05.10 한글파일한글 (hwp) | 17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항전승리 직전 국·공양당의
중국 미래에 대한 제안
2. 8년 항전승리직후의 국내외 정세
3. 국·공 담판과 무력 충돌의 조짐
4. 전후 중국과 미국·소련과의 관계
5. 국민정부 헌정실시와 위기의 가중
6. 국·공 전면전과 최후 담판의 실패
7.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국공내전은 중국에서 항일전쟁이 끝난 후 중국 재건을 둘러싸고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벌어진 국내전쟁이다. 국내전의 움직임은 일본의 패배가 결정적인 단계로 접어들면서 현저하게 나타났다. 일본침략군이 항복한 1945년 8월 평화를 갈구하는 중국 국민의 여망을 배경으로 국민당의 장개석과 공산당의 모택동이 충칭에서 화평교섭회담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은 미국의 원조하에 끝내 중공(중국공산당)과의 제3차 국공합작을 거부하고 장개석은 4대 1이라는 압도적 군사력을 배경으로 협정을 파기하였다. 한편 모택동도 강경히 이에 맞서 응전태세로 나왔기 때문에 마침내 1946년 전면적인 내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내전의 결과 초기의 열세였던 공산당이 승리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중 략>

다음 날, 소련을 비롯하여 유고슬라비아ㆍ불가리아ㆍ루마니아 등이 신중국을 승인하여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창당한지 28년 만에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사회주의 공산권으로부터 먼저 승인 받게 되었다.
10월 21일에 중앙인민정부 정무원이 성립되었다. 정무원은 총리, 부총리와 각 위원회 주임과 각 부장 27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민주당파 인물은 10명이 들어 있었다.
건국초기 민주당파와 무당파 소속의 인물이 중앙인민정부의 부주석 가운데 60%, 정무원 부총리 가운데 50%, 정ㆍ부장 가운데 40%를 점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은 표면적으로나마 민주당파 인사들의 적극적인 협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이것은 민주당파 인사들이 중국국민당의 오랜 정치경험으로 국민정부의 성격을 잘 알았기 때문에 협조적이었다고 풀이된다.
공산군은 양자강을 건너 진군하라는 명령을 전군에 내렸고 남경, 무한, 서안, 상해를 차례로 점령하고 국민정부가 남경에 이어 수도로 삼은 광주까지 점령했다. 화의 결렬 후 국민당 총재 장개석은 끝까지 전세를 만회하려 노력해 11월 광주의 뒤를 이어 수도가 된 중경까지 직접 가서 사천성 방어전을 계획했으나 중경도 공산군에게 함락되었다. 국민정부는 이어 성도(成道)로 수도를 옮겼다가 11월 27일 여기서 철수해 대만으로 옮겨 감으로써 중국대륙은 완전히 공산당 지배하에 들어갔다.

참고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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