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입력폼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자주교육운동,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제주도 행정구역 승격,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3 1시위,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2차미소공위 반대시위, 구국투쟁위원회 분석

저작시기 2013.04 |등록일 2013.04.27 한글파일한글 (hwp) | 10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Ⅰ. 개요

Ⅱ.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자주교육운동

Ⅲ.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제주도당

Ⅳ.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제주도 행정구역 승격

Ⅴ.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3 1시위

Ⅵ.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2차미소공위(2차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의) 반대시위

Ⅶ.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구국투쟁위원회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개요

제주도는 전형적인 농촌사회이다. 제주도는 일제의 지배기간을 통틀어 도민들의 약 85%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이 비율은 당시 전 국민의 농업종사비율보다 높았다. 따라서 제주도는 당시 농업에 치중되어 있는 경제구조를 보였으며 미분화된 직업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한편 제주도는 한반도 전체 혹은 남한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소작농의 비율이 아주 낮았다. 농업에 종사한 대부분의 농민은 자영농이었다. 지주-소작관계가 약했다는 사실은 조선시대부터 일제를 거치면서 해방이 되었을 때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제주도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지주-소작관계가 약하고 자영농 비율이 높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것은 제주도에는 논이 작고, 대부분 농지는 척박한 토질을 지닌 밭이었던 관계로 토지생산성이 낮았다는 것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논은 전체농지의 1%내외를 차지할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밭이었으며 또한 토지생산성도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낮았다.

<중 략>

한편 이 무렵 이념문제에 대한 미군정의 태도는 모호하였다. 미군정은 1947년에 접어들면서 우파정당과 단체를 배후지원하면서도 외형적으로는 좌우익에 대해서 똑같은 대우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46년 6월 이승만의 정읍발언 이후 남한단정설이 끈질기게 나돌고 있을 때에도 미군정은 이를 극구 부인, 일반주민들에게 통일정부의 꿈을 부풀게 만들었다. 특히 47년 5월 21일부터 제2차 미소공위가 전개되자 군정관리들도 공공연히 좌우합작을 이야기하는 분위기였다. 제주도군정장관 베로스중령도 『좌우익의 정당 관계자가 관공리 직원으로 취직할 수 있다』고 발언하는가 하면 김영배 제주경찰감찰청장까지도 『나의 희망은 제주도만은 좌우가 손을 잡고 나가도록 합작운동에 노력할 심산』이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7월에 재편작업에 들어간 제주민전은 초대지사직에서 사임한 박경훈을 영입, 의장으로 전격적 추대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참고 자료

박보식(2005), 지방 행정 구역의 개편 :제주도를 중심으로, 강원행정학회
양정심(2007), 4.3항쟁과 남로당 제주도당, 수선사학회
정상우(2008),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시기의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 헌장안」에 관한 연구, 한국헌법학회
정석균(2000), 제주 4·3사건의 진상, 국방부
정석균(1988), 제주도폭동과 토벌작전, 국방부
홍석표(1993), 1947년 제주도 3·1절기념시위사건 연구, 제주산업정보대학
다운로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