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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배경,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주체,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원인,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전개과정, 진주만공습의 미일교섭(미국과 일본의 교섭)

저작시기 2013.04 |등록일 2013.04.16 한글파일한글 (hwp) | 12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Ⅰ. 개요

Ⅱ.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배경과 주체
1. 미국이 바라본 일본
1) 대일 유화정책
2) 루즈벨트 대통령
3) 코델 헐
2. 일본이 바라본 미국
1) 대동아 공영권 구상
2) 고노에 수상
3) 야마모토 이소로꾸

Ⅲ.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원인

Ⅳ.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전개과정

Ⅴ. 진주만공습(진주만공격)의 미일교섭(미국과 일본의 교섭)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개요

일본의 역대 수상 혹은 자민당의 고위직을 거친 인물들 중 전전의 지배층 당사자 혹은 그 자손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1957년 수상을 지낸 기시 노부스케, 자민당 등 보수정계의 흑막으로 종횡무진 활동하였던 고다마 요시오 등, 이들 전전 지배엘리트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의 대대적인 정계ㆍ재계 복귀는 독일의 나치 전범 처리와는 대조적으로 전전의 이데올로기의 지속을 예고하는 중요한 역사적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전쟁책임문제가 완결되지 못하고 있는 주요 원인은 이들 장본인과 그 후손이 그들의 정치적ㆍ사회적ㆍ경제적 지위의 지속성에 의해 현재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각종 망언과 역사 왜곡은 이들의 주도 아래 혹은 그 영향권 하에 있는 엘리트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당초 도쿄재판을 전후하여 100명 이상의 A급 전범 용의자가 체포되어 1946년 4월 28명의 피고가 기소되었고 나머지 용의자들은 스가모 형무소나 자택에 구금된 상태였으나, A급 전범 용의자들의 석방은 황족을 중심으로 이미 재판 전후로 은밀히 진행되었다. 석방에는 GHQ의 담당기관으로서 검찰국, 법무국, 참모 제2부의 승인이 필요했으나, 이들 기관들로부터 이견은 없었으며 황족에 이어 재계 인사의 석방이 이루어졌고 석방자수는 점차로 증가하였다. 석방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참모 제2부의 책임자 윌로비로 그는 1947년 6월에는 고다마 요시오와 사사카와 요이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용의자를 석방할 것을 권고하였다. 한편, 맥아더 역시 애초부터 A급 국제재판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1947년 10월 맥아더는 미국 육군 앞으로 보낸 기밀전보에서 나머지 A급 용의자는 다음의 A급국제재판에 회부할 가능성이 없다며 법무부가 그들을 B, C급의 혐의로 낮춰서 미국의 단독재판에 회부해줄 것을 권고하였고, 재판에 회부할 수 있는 권한을 맥아더 자신에게 주도록 요구하였는데, 미국 정부는 이 제안을 수용하였다.
미 법무부는 고다마, 사사카와 및 육군의 다무라 히로시, 해군의 도요타 소에무 등 4명과 기시 노부스케, 아베 겐키 등 전 관료 8명을 B, C급으로서의 소추 준비를 명령했고, 이 중 다무라와 도요타는 GHQ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나머지 전원은 법무국이 소추할 만하다고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서는 불기소되었다. 또한, 도쿄재판에서 7명이 교수형을 받은 다음날인 1948년 12월 24일 나머지 19명(2명은 이미 사망) 전원은 재판에 회부도 하지 않은 채 석방되었다.

참고 자료

김태준 - 전략적 기습으로서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연구, 국방대학교, 2010
김순호 - 진주만 기습공격 작전의 전후, 대한민국 공군, 1973
김영숙 - 일본의 진주만 기습과 재미 일본인 사회의 동향, 한국일본어문학회, 2011
백상환 - 태평양 전쟁의 원인과 진주만 기습이 갖는 의미, 대한민국 육군, 1996
침사수 - 진주만기습공격의 연구, 공군사관학교, 1966
칼 스미스 저, 김홍래 역 - 진주만 1941, 플래닛미디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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