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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부대의 의거(봉오동전투), 백야 김좌진장군의 의거(청산리대첩), 도마 안중근의사의 의거(이토히로부미살해), 매헌 윤봉길의사의 의거, 이봉창의사 의거, 한국 근현대사 의거

저작시기 2013.04 |등록일 2013.04.15 한글파일한글 (hwp) | 20페이지 | 가격 3,000원

목차

Ⅰ. 서론

Ⅱ. 독립군부대의 의거(봉오동전투)

Ⅲ. 백야 김좌진장군의 의거(청산리대첩)
1. 청산리대첩
2. 청산리대첩의 결과 및 의의

Ⅳ. 도마 안중근의사의 의거(이토히로부미살해)

Ⅴ. 매헌 윤봉길의사의 의거(훙커우공원사건, 루쉰공원사건, 홍구공원사건)

Ⅵ. 이봉창의사(열사)의 의거(사쿠라다문사건)

Ⅶ. 한국 근현대사(근대사)의 의거(4월혁명)
1. 2 28 데모
2. 3 15 마산선거
3. 마산 2차 의거
4. 4 18 고려대 데모 등 대학가의 항거
5. 피의 화요일
6. 교수단 데모
7. 민권승리의 날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3 1운동 후에 만주지역에서는 많은 독립군이 편성되었는데, 그것을 살피기에 앞서 먼저 그곳에서 항일무장독립군이 형성될 수 있는 배경, 즉 조건들에 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첫째로 국내에서 항일의병항전의 풍부한 경험을 쌓은 노련한 많은 항일의병장과 의병들이 이곳으로 집결하였다는 사실이다. 충북 유생의병장인 유인석(柳麟錫), 평민 의병장인 홍범도(洪範圖), 평안도의 의병장 조병준(趙秉準) 김덕원(金德元) 등을 비롯하여 국내 항일의병항전에서 살아 남은 많은 의병들이 만주로 이동해 들어갔다. 두 번째 배경으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으로 망명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애국지사 가운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은 신민회(新民會)의 회원들이었다. 이들 신민회 회원들은 1909년의 비밀회의에서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설정하고, 그곳에 군관학교를 창설하여 많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해 냄으로써 장차 국권회복을 도모할 것을 의결하였다. 세 번째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 장교들의 항일무장 독립군진영으로의 가담이다.

<중 략>

3월 15일 선거일은 ‘4할 사전 투표’, ‘3인조 9인조 공개투표’, ‘자유당 후보 득표 85% 이상 확보’등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이에 격분해서 일어선 것이 마산의 학생들과 시민들이었다. 비조직적이고 자연발생적이었던 이날 이곳의 시위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늦게까지 마산의 중심가를 누비며 부정선거를 규탄했으며, 이에 맞선 이승만 정권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강력하게 대응하는 한편, 시위대의 배후에는 북한괴뢰도당이 있다는 삐라를 뿌려 시위에 대한 민중들의 호응을 낮추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그러나 부정선거반대는 언론계, 학계, 법조계로 확대되었고, 학생들의 동조시위가 확산되었으니, 3월 15일 부정선거에 반대하여 마산에서 일어났던 시위를 제1차 마산봉기라고 부른다.

3. 마산 2차 의거

부정선거 반대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던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한 주검이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다. 마산상고생 김주열군이 었다. 제1차 마산봉기때 시위에 가담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 주위에 박혀 사망한 것을 경찰이 마산 앞바다에 유기 했다가 뒤늦게 떠오른 것이었다. 또다시 마산시민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살인경관을 죽여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으며, 이것을 제2차 마산봉기라고 부른다. 이제 시위는 단순한 부정선거규탄이 아닌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는 것으로 그 성격이 격상되었다.

참고 자료

김용달, 한국독립운동과 청산리대첩,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2005
김기승, 4월 혁명과 한국의 민족주의,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0
윤병석,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의 역사적 의의, 인하대학교한국학연구소, 2009
장세윤, 홍범도 장군과 봉오동전투,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1993
한시준,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에 대한 중국신문의 보도, 문화체육관광부, 2009
한시준, 이봉창 의사의 일왕저격의거, 한국역사연구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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