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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호(國號),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특파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선전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인성학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유일당운동,독립운동정당

저작시기 2013.04 |등록일 2013.04.15 한글파일한글 (hwp) | 15페이지 | 가격 2,500원

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호(國號)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특파원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선전활동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정책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인성학교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유일당운동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정당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1927년 3월 제3차 개헌을 통해 채택된 국무위원회제는 1940년까지 임정의 지도체제로 운영되었다. 국무령제하에서 내각 구성이 이루어지 않은 극복방안으로 채택된 국무위원회제는 임시의정원이 임정의 최고 권력으로 부상하여 형식상 임시정부의 ‘행정부’인 국무위원회의 권한이 축소된 반면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해 임정의 유지를 위한 자구책의 성격을 띠었다.
임시정부 지도체제의 개편이 주요한 목적이었던 대한민국 임시약헌은 민족운동전선에서 제기된 민족유일당운동을 수용하여 독립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완성될 때에는 국가의 최고권력이 이 당에 있고 임시헌법의 개정도 위임한다는 조항을 삽입하여 임시의정원의 해산을 명시했다. 그러나 임시약헌이 명시한 이 조항들은 임시의정원이 가진 임무 권한이 당으로 이관되는 것이었고, 임시정부를 그 역할과 기능에서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존속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임정이 수용한 이당치국론은 임정을 독립운동의 총 지도기관으로 설정한 점에서 ‘혁명정당론’에 바탕한 민족유일당운동과는 그 목적이 달랐고, 이러한 차이는 임정이 민족유일당운동을 적극 수용하지 못한 요인이 되었다.

<중 략>

1937년 7월 7일에 일어난 중일전쟁은 또 다시 관내지역 독립운동계의 변화를 가져왔다. 김구는 민족혁명당에서 탈퇴한 한국독립당(재건)과 조선혁명당을 한국국민당과 하나로 묶는 연합체 구성에 착수하였다. 그것이 바로 1937년 8월에 만들어진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光復陣線]였다. 이에 대해 김원봉은 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조선혁명자연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묶어 1938년 2월 하순 漢口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民族戰線]을 조직하였다. 이로써 관내지역 독립운동 세력은 양대 연합체제를 형성하였다.
양대 정당체제라든지 양대 연합체제는 이념과 강령 및 정책적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중국국민당정부의 지원 노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중국은 중국국민당 조직부장 陳果夫와 蕭錚을 통해 김구를, 중국군사위원회 藤傑을 통해 김원봉을 각각 지원하였다.
蔣介石은 직접 나서서 이들 양대 세력을 하나로 묶어 보려 했다. 그는 1938년 11월에 김구를, 다음해 1월에 김원봉을 초대하여 양 세력의 결합을 종용하고 나섰다. 그 결과 두 사람은 1939년 5월에「동지 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여 “전 민족적 역량을 집중한 통일조직의 건설이 요구되며, 통일조직은 전 민족의 의견과 요구에 의한 혁명적 강령에 기초하여야 한다”라고 천명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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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1997),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 도산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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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희(1986),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새로운 인식, 한글학회
유영익, 반병률 외 3명(2009),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연세대학교출판부
장동완(1984),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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