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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시기 2013.04 |등록일 2013.04.12 한글파일한글 (hwp) | 9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Ⅰ. 개요

Ⅱ. 항일과 항일투쟁

Ⅲ. 항일과 항일의병

Ⅳ. 항일과 항일운동
1. 전기(前期) 의병
2. 후기 의병

Ⅴ. 항일과 항일학생운동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개요

해방을 앞둔 중경 임시정부에서는 대외적 승인과 대내적 통일․단결에 기초한 항일민족통일전선 결성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특히 얄타회담의 결과는 임정의 당면한 두 가지 과제를 보다 급속히 추진할 것을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 38차 임시의정원 회의와 5당통일회의에서는 임정을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제출되고 논의되었다. 구체적으로 독립운동자대표대회, 임시의정원․임시정부 확대․개조, 임시헌장 수개, 건국강령 수개 등의 문제가 핵심적인 사안이었다. 임시정부에 참가한 중경의 5정당은 모두 임시정부의 내부 통일․단결과 외연의 확대를 통한 항일민족통일전선 결성에는 동의했지만, 당파적 이해와 요구가 결합되면서 완전한 합의점을 찾지는 못했다.
특히 민족해방운동선상에서 임정의 대표성과 영도성을 보장하기 위한 독립운동자대표대회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방침이 확정되질 못했다. 바꿔 말하면 임정은 시급성이나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 구축을 위한 강령의 제정이나 통일의 원칙 등 명확한 자기 노선을 정립하지 못했다. 임정은 통일전선 결성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지도, 연대와 포섭의 대상 및 범위를 정하지도 못했다. 이는 당시 임정이 처하고 있던 객관적 현실이자 위상이었고, 임정의 역량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임시정부 내부에서 당파적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항일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위한 구체적 원칙과 방안이 확정되지 못했지만, 김구 등 임정의 핵심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해외 항일단체와의 연대를 시도했다. 구체적으로 화북조선독립동맹, 만주항일빨치산, 국내 건국동맹과 연락․연대를 위한 시도들이 있었다. 이는 임정의 일방적인 요청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해방을 목전에 둔 각 세력들의 추동력이 상호 결합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화북․만주․국내의 항일세력들 역시 단일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이 시급함을 인식하고 있었고, 각자가 주동적 입장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주도하고자 했다.

참고 자료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편집부(2006), 한국인의 항일운동에 대한 일본의 시각,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박민영(2010), 독립군과 한국광복군의 항일무장투쟁,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송석창(1986), 한말 항일의병 활동과 그 성격, 동국대학교
유준기(2003), 근대 항일운동과 민족정기, 현대사회연구소
정세현(1974), 일제말기의 항일학생운동, 숙명여자대학교
최용수(1997), 조선혁명가들의 항일투쟁, 국학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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