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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시기 2013.03 |등록일 2013.03.30 한글파일한글 (hwp) | 13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Ⅰ. 서론

Ⅱ. 조선왕조의 법

Ⅲ. 조선왕조의 묘호

Ⅳ. 조선왕조의 왕복
1. 면복(冕服)
1) 면류관(冕旒冠)
2) 곤복(袞服)
2. 조복(朝服)
3. 상복(常服)
4. 편복(便服)

Ⅴ. 조선왕조와 조선왕조실록

Ⅵ. 조선왕조와 경국대전
1. 대명률의 의용과 형전
2. 토지제도의 호전

Ⅶ.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유교에서는 천자가 천명을 받아 백성을 통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하늘(천)에 대한 제사는 오직 천자만이 지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주례 월령에 “천자는 천지와 명산대천에 제사하고, 제후는 경내의 명산대천에 제사하며, 대부는 오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조선의 국왕은 하늘에 제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도 하늘에 제사하는 원(환)구단이 있었고, 원구제를 행하여 호천상제와 오제를 제사지낸 바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제천행사에 대하여 명나라에서는 홍무예제의 번국예에 따라 제천행사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명나라는 일찍이 고려와 안남에 제관을 직접 파견하여 산천에 제사한 바 있었다. 이는 고려나 안남의 산천이 명나라 천자의 천하임을 표방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명나라 초기에 있었던 일이었고, 뒤에는 크게 완화되었다.

<중 략>

조선 초에 양인과 천인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전체 양인에 대해 법제적으로 동등한 의무와 권리를 부여한 것은 국가의 기반을 확대하여 지배층의 이익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현실적인 필요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지배층은 여러 의무를 회피하였고, 국역체계나 조세제도는 이들의 이익이 보장되도록 운영되었다. 권세가나 지주의 군역기피 현상이나 군역에서 대립(代立), 요역과 공물의 부담에서도 대역(代役)이나 방납(防納)이 만연하여 양인농민의 국역부담은 증가하였고 그로 인해 농민의 도방과 피역이 많아졌으며, 남아있는 양인농민에게는 첩역(疊役)이 보편화되었다. 많은 양인 전호농민이 노비로 가장하여 국역부담에서 빠져나갔고, 지주들은 이를 이용하여 수탈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양천제는 한편으로 지주가 전호를 더 확고하게 지배하고 경제외적 강제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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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남 - 조선왕조 경국대전의 헌법적 의미, 단국대학교부설법학연구소, 2007
박인순 - 조선왕조의 건국이념과 초기 구휼정책의 전개, 제주한라대학, 2011
이재룡 - 조선 왕조 법 제도에서의 시간과 공간의 의미, 동양사회사상학회, 2003
이병탁 - 조선왕조의 국장제도, 구리문화원, 2005
엄정옥 - 조선왕조 친잠의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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