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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시기 2013.03 |등록일 2013.03.30 한글파일한글 (hwp) | 8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Ⅰ. 개요

Ⅱ. 일본영화와 영화무역
1. 영화관 입장자수와 지상파 텔레비젼의 출현
2. 영화산업에 미치는 영화보조창구의 역할 : 일본과 미국의 케이블 텔레비젼, 위성방송, 영화채널의 보급률 비교
3. 홈비디오 대여 및 판매

Ⅲ. 일본영화와 공포영화

Ⅳ. 일본영화와 한국영화

Ⅴ. 일본영화와 친일영화

Ⅵ. 일본영화와 구로사와아키라

Ⅶ. 일본영화와 식민지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개요
근대화의 일환으로 다른 서구의 문물들과 함께 일본으로 유입된 영화는 1899년 최초의 일본영화인 <단풍놀이(紅葉狩)>의 상영을 시작으로 하여 지방 순회공연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어갔다. 물론 1903년 요시자와(吉澤)상점이 경영부진에 빠져있던 아사쿠사(淺草)의 전기관(電氣館)이라는 극장에 필름을 제공하면서 최초의 전문영화관이라고 할 수 있는 상설영화관이 탄생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영화상영은 공연의 하나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주류는 지방 순회공연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본영화만의 독특한 형식으로 영화설명자라고 할 수 있는 변사를 들 수 있는데 1930년대 토키영화가 탄생하기까지 변사는 분라쿠(文樂)와 가부키(歌舞伎)라는 일본 전통극의 영향을 받아 하나의 예(藝)로서 무성영화시대에 일본영화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중 략>

한국은 일본이 대만에서처럼 쉽게 영화산업을 장악하지 못했다. 총독부에서는 교육계몽영화를 계획하여 윤백남의 ‘월하의 맹세’를 만들지만 그 이상으로 민간에서의 영화제작이 이루어졌고, 1924년 일본인이 조선키네마를 설립하면 이에 대항하여 한국인들이 독립제작사를 수도 없이 설립하였다.
이러한 민간의 영화제작 붐은 바로 한국영화의 황금기로 이어진다. 1920년 신화를 일으킨 나운규의 ‘아리랑’을 시작으로 이경손의 ‘장한몽’, 이규환의 ‘임자없는 나룻배’등으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의 다분히 항일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일본영화의 형식을 모방했다는 한계점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일본에서 신파영화의 유행과 경향영화의 유행을 그대로 따랐음이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일본의 시대극만큼은 한국에서 발달하지 못했다. 또한 최초의 토키작품은 일본보다 다소 늦은 1935년 이명우의 ‘춘향전’으로 나타났다.

참고 자료

구견서(2005) / 일본식민지의 영화와 시대성, 한국일본학회
유양근(2010) / 전쟁기 일본영화와 일본인의 자기 인식,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이상우(2002) / 1940년대 이후 일본과 미국사이의 영화 무역, 한국언론학회
정수완(2001) / 전후 일본영화와 한국영화의 비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조혜정(2009) / 친일영화에 새겨진 친일담론의 양상과 국민통합 이데올로기 연구,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코헤이 카와사키 외 1명(2008) / 인간이 아닌 인간 : 일본 공포 영화와 공포 만화의 가능성,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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