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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시기 2013.03 |등록일 2013.03.27 한글파일한글 (hwp) | 7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Ⅰ. 개요

Ⅱ. 고려 성종의 세력

Ⅲ. 고려 성종의 병력편제

Ⅳ. 고려 성종의 향직개편

Ⅴ. 고려 성종의 배향공신

Ⅵ. 고려 성종과 국자감

참고문헌

본문내용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으면서 이에 근거한 민본사상이 강조되었다. 민본사상의 현실 정치에의 반영이라 할 수 있는 진휼정책이 중시되고 義倉이 설치된 것은 그 결과였다. 그러나 고려의 유교는 처음부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왕과 문벌귀족 사이의 길항관계 속에서 각기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수단으로 유교가 이용되었던 것이다. 왕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신진관료를 등용하여 이들을 세력화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고, 이에 대해 문벌귀족은 유교의 德治를 왕권의 견제에 이용하였다. 이 같은 상황이었기에 유교 본래의 정치이념은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중 략>

과연 中央軍이 番上入役하는 農民軍들로 편성되어 있었다면 국가는 그들의 군역에 대하여 어떤 종류의 제도적 보상을 하였을까. 고려정부는 양반관료계급에 대해서 뿐 아니라 군인들에 대해서까지도 토지를 지급하는 방식의 보수제도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즉 穆宗 원년에 개정된 「文武兩班及軍人田柴科」규정에 의하면 마군은 전 23결을 그리고 諸步軍은 전 20결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문무관료들과 더불어 소정의 토지를 받도록 규정된 馬軍이라든지 諸步軍은, 물론 전국의 군인 일반이 아니라 중앙의 정부 직속군이었다. 그리고 이들 특정 부류의 군인들을 위해 제정된 전시과 제도상의 토지가 곧 軍人田이었던 것이다.

<중 략>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恭讓王代에 유명무실화된 私學을 公式的으로 廢止시키면서부터였다. 이후 朝鮮 初期에는 高麗의 私學과 같은 敎育機關은 設立되지 않는다. 이것은 高麗 前期에 私塾을 私學으로 公認하여 敎育의 機會를 擴大하려는 정책과는 달리, 鄕校를 擴大하는 政策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고, 高麗 中期의 敎育政策을 보다 本格的으로 推進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朝鮮이 開國한 지 하루 만에 발표되는 太祖의 卽位 敎書에서, ‘中央에는 國學을 두고, 地方에는 鄕校를 설치하여 生徒를 增員함으로써, 敎育을 ?勵하고 人才를 기르겠다’고 한 것은 敎育體制를 官學 中心으로 强化시키겠다는 意志를 말해 주고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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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진(2001) / 고려 성종 14년의 군현제 개편에 대한 연구, 규장각한국학연구소
윤경진(2011) / 고려 성종 - 현종초 북방 개척과 주진 설치, 한국외국어대학교역사문화연구소
장동익(1994) / 고려후기외교사연구, 일조각
최인표(2004) / 고려 성종의 유교정치이념 채택과 역사적 의의, 한국국학진흥원
최봉수(2011) / 도제의 기원에 관한 연구 : 고려 성종의 12목을 중심으로, 한국지방자치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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