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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유성룡의 붕당론과 그의 학문

저작시기 2012.05 |등록일 2013.03.18 한글파일한글 (hwp) | 13페이지 | 가격 1,500원

목차

1. 유성룡의 출신 기반
2. 유성룡의 朋黨論
3. 유성룡의 學統
4. 退溪學脈의 傳受

본문내용

1. 유성룡의 출신 기반
유성룡(1542년(중종 37)∼1607년(선조 4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1) 유성룡은 경상도 안동부 풍산현의 서쪽 하외촌에서 世居하여 오던 풍산류씨 집안 출신으로서 父 유중영(1515-1573, 중종 10-선조 6)과 母 안동김씨 (성균진사 광수(光粹의 女))사이의 셋째아들로, 외가가 있던 의성현 사리촌(義城縣 沙里村)에서 태어났다.
풍산유씨는 고려 초부터 안동부의 속현이던 풍산현의 土姓으로서 戶長직을 장악하여 왔는데 柳佰(서애의 9대조)에 이르러 충렬왕 16년(1290)의 은사과에 급제하면서부터 향리지위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 아들 난옥(蘭玉)과 손자 보(?)가 도량서령(都梁署令)과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을 역임하게 됨으로써 士族化의 길을 밟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유성룡의 선대는 고려말에 향리에서 사족으로 성장한, 흔히 말해지는 신흥사족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중 략>

그는 이황이 존중한 《心經》을 부연하여 《心經發揮》를 저술하는 등 모두 34종에 달하는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그러나 그 학문의 정수는 예학에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정구는 예의 근본은 마음에 있고, 마음은 경을 통하여 수양을 이룬18다고 보았다. 그는 이황의 거경심학을 예학으로 구체화시킨 것이다.
정구는 金宇?과 이이의 추천을 받아 관직을 제수받은 적이 있었으나, 바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서 학문 수양에 힘쓰다가, 38세 때에 창녕현감을 나간 것을 시작으로 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조정의 관직보다는 外職을 즐겨 맡았는데, 교학을 힘쓰고 양민을 구제하기에 힘써 治民의 效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였고, 가는 곳마다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영남지역에서 정구의 주요 문인들을 살피면, 장현광과 함께 朴惺(현풍)·徐思遠(대구)·趙靖(상주)·成安義(봉화)·李潤雨(칠곡)·崔東?(대구)·李民宬(의성)·朴檜茂(영주)·金光繼(예안)·鄭允諧(예천)·鄭允穆(예천)·全以性(상주)·文緯(거창)·鄭蘊(거창)·許穆(경기 연천)이 있다. 앞에서 살핀 조목·김성일·유성룡과 달리 정구의 문인들은 영남지방의 전역에 걸쳐 있었던 것이다. 이들 중에 후학들에게 길이 영향을 주기는 장현광과 허목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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