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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문화를 모형으로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을 기대했던 중국과 일본. 그러나 이들이 근대사회로 나가는 길은 각기 처한 상황에 따라 크게 달랐다. 이는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유신으로 증명되었다.

저작시기 2013.02 |등록일 2013.02.23 한글파일한글 (hwp) | 6페이지 | 가격 3,000원

소개글

서구문화를 모형으로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을 기대했던 중국과 일본. 그러나 이들이 근대사회로 나가는 길은 각기 처한 상황에 따라 크게 달랐다. 이는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유신으로 증명되었다.

목차

Ⅰ. 서론

Ⅱ. 동아시아 근대화의 개시
1. 중국의 양무운동
1) 배경과 그 주도세력
2) 양무운동의 과정과 의의
3) 양무운동의 실패와 한계
2. 일본의 메이지유신
1) 메이지유신의 성립과 의의
2) 메이지유신과 부국강병
3) 메이지유신의 영향과 한계점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서구 자본주의 세력은 자본주의적 팽창을 위해 19세기 중반부터 무력을 동원하여 동아시아 사회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하여 중국을 중심축으로 동아시아 사회에 대해 경제적 ? 군사적 ? 정치적 침략을 감행하였다. 동아시아 사회는 서구 자본주의 세력이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다른 문화권을 침략하고 짓밟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러한 서구 세력을 반인륜적 이적과 금수의 문화로 규정하고 반발 ? 저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서구 세력의 침략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서구 세력의 요구에 따라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문화적 자존심에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들은 서구의 자본주의 문화를 도입하여 국력을 배양함으로써 손상된 문화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중 략>

또한 그 한계점에 있어, 메이지유신은 군사력의 행사라는 끊임없는 위협을 배경으로 ‘자유무역’을 가제할 것을 기조로 했다는 점에서 민중자신의 적극적이고 자각적 활동으로 달성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막말기의 봉건제 모순의 격화는 외국자본주의의 접촉을 계기로 폭발하였지만 유럽에서 스스로 봉건질서를 타파하여 새로운 시민사회를 건설하였던 시민계급은 일본에서는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명치유신을 순수한 시민혁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 그 지도력을 장악한 인물도 사쓰마 ? 쵸우주 등 서남웅번의 하급무사 출신이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원래부터 무사계급본위의 봉건사회의 해체를 의도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구미열강의 동양 식민지화의 현실에 맞서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봉건제의 해체와 근대적 통일국가의 건설은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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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경 외, 『동아시아 문화와 사상(동아시아 문화포럼1호)』, 열화당,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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