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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흑도회][흑우회][한인단체]1922년의 흑도회, 1922년의 흑우회, 1922년의 한인단체, 1922년의 동경동맹회, 1922년의 코민테른, 1922년의 태을교

저작시기 2013.02 |등록일 2013.02.22 한글파일한글 (hwp) | 8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Ⅰ. 1922년의 흑도회
Ⅱ. 1922년의 흑우회
Ⅲ. 1922년의 한인단체
Ⅳ. 1922년의 동경동맹회
Ⅴ. 1922년의 코민테른
Ⅵ. 1922년의 태을교

본문내용

Ⅰ. 1922년의 흑도회
흑도회는 구성원의 다양한 성향으로 인해 조직적 활동을 펼치지는 못했으나, 동우회 간부진의 참여로 노동문제 및 기관지 발간 등에 높은 의욕을 보였다. 우선 흑도회 활동방향을 알 수 있는 자료로 ‘동우회선언’을 주목할 수 있다. 1922년 2월 4일《朝鮮日報》에 동우회 명의의「전 조선노동자 제군에게 고한다.」라는 글에서 이들은 앞으로 “일본의 주요 사상단체와 제휴하여 노동대학 설립, 잡지『同友』의 발행 등 노동운동을 전개하려하며 이제부터는 고학생 및 노동자의 단순한 구제기관이 아니라 직접적인 계급투쟁기관이라는 사실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김약수, 박열 등 11명이 연서한 이 선언문은 동우회를 친목적 노동단체에서 계급투쟁 기관으로 전환하겠다는 뜻을 표방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연서자인 김약수, 김사국, 박열, 원종린, 임택용 황석우 등은 이미 흑도회에 가입한 상태였으며 홍승노 등도 관련인물이다. 이들이 밝힌 사업계획 중 노동대학 설립은 大杉榮의 ‘平民大學’을 염두해 둔 것으로 보이지만, 기관지는 흑도회의『黑濤』지 발간으로 현실화되었다. 하지만 동우회는 내부진통을 거쳐 순수 노동단체로 남아 있다가 1923년 5월 제 4차 메이데이행사 이후 자연 소멸되었다. 때문에 ‘동우회선언’은 동우회 명의로 발표되기는 했지만, 노동단체의 한계를 절감한 간부진들이 흑도회에 가입 후 향후 활동방향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또 조직 활동은 아니지만, 일부 회원들의 일본 메이데이행사 참여도 흑도회의 활동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그해 5월 2일 동경에서 열린 제 3차 메이데이행사에 당시 동우회 대표 白武는 동료 4-5인과 함께 참여하였다. ‘최초의 참가 조선인’으로 소개받은 그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조선인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조선인만의 힘으로는 부족하고 일본의 반제세력이나 사회주의자, 수평사운동과 손을 맞잡아야만 조선독립운동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내용의 인사말을 했으며 행진 도중 검속되었다고 한다.

참고 자료

김명섭 : 흑도회의 결성과 활동(1921년-1922년), 단국대학교사학회, 1998
김명섭 : 흑우회의 활동과 이념, 1922년-1927년, 한국역사연구회, 1999
김인덕 외 2명 : 1920년대 이후 일본·동남아지역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성주현 : 1920년대 초 태을교인의 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1
정혜경 : 대판 한인단체의 성격(1914년-1922년), 한일관계사학회, 1995
최규진 : 코민테른의 기억과 현실 정치, 경상대학교사회과학연구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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