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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인성물성 논쟁

저작시기 2009.09 |등록일 2012.05.08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7페이지 | 가격 1,800원

소개글

조선후기 성리학의 핵심논쟁중 하나인 인성 물성논쟁(호락논쟁)에 대해 원문을 중심으로 파악해본다.

목차

1.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이란?
2. 인물성동이논쟁의 배경
3. 인물성 동이 논쟁의 내용
① 성개념의 다의성
② 理通氣局과 理氣不相離
(2)인물성이론 (남당 중심)
① 理通氣局과 性字의 개념
3. 미발심체의 선악에 대하여

본문내용

1.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이란?
조선후기 노론계통의 학자들사이에서 사람과 사물의 성(性)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벌였던 논쟁(人物性同異)으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한원진(韓元震;1682~1751)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호서(湖西:지금의 충청도 일대)지방에 거주하였고,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이간(李柬;1677~1727)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낙하(洛下:지금의 서울 일대)지방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그들 간에 전개된 인물성동이론을 그들의 거주지를 따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 한다. 두산 세계대백과사전 참조



2. 인물성동이논쟁의 배경

논쟁은 율곡 이이(1536∼1584)에서 우암 송시열(1607∼1689)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적통인 수암 권상하(1641∼1721)의 문하에서 제기되어 본격화된다. 그의 문하에는 이른바 <江門八學士>로 불리는 8인의 학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남당 한원진(1682∼1751)과 외암 이간(1677∼1727)이 가장 뛰어나 강문쟁론(江門爭論)의 장본인이 된다.

한원진은 1715년에 이미 인물성론에 관해 이미 정리된 입장을 밝히고 있었고 이간은 1709년 최성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오상(五常)과 미발(未發)에 관한 논의를 한 바 있다. 즉 1712년에 논쟁을 벌이기 전에 이미 이들은 자기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토론은 외암 이간(1712)이 스승인 수암 권상하에게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의 마음이 순선(純善)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는데 처음에 수암은 외암의 설에 수긍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미발 때 선악이 있다고 하는 남당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남당이 찾아와서 자기의 의견을 자세히 설명하자 수암은 이번에는 남당의 설을 인정하였다. 즉 사람이 태어나면서 기질지성 (氣質之性) 을 가지게 되니 이것은 선악의 가능성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발시 항상 악한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되자 수암은 이전의 외암의 설이 옳은 것이 아니고 남당의 설이 옳다고 하면서 율곡의 이통기국의 해설까지 덧붙여 숙종 38년(1712) 외암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자 외암은 그의 스승 수암 권상하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과 남당의 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 하였고 이통기국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달리하게 되면서 그들의 논쟁은 본격화되었다. 남당은 외암이 스승 권상하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스승을 대변해서 외암의 설을 반박하였고, 여기에 외암이 직접 남당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논쟁은 더욱 가열화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남당도 외암의 설을 직접 반발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들의 이론적 논쟁은 개인적 논쟁으로 끝나지 않았고, 집단적 논쟁의 성격을 띠면서 조선말까지 계속되었다.

참고 자료

<주자어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해설
<외암유고> 서울대학교 규장각 해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최영진, <대학혹문>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서정운, <남당의 학문연구> 전남대학교 출판부
이명진<호락논쟁의 탐구: 남당과 외암의 논쟁을 중심으로> 성신여자대학교 박사과정 논문
이애희 <조선 후기 인성과 물성에 대한 탐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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