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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문학- 판소리의 형상과 발전 그리고 유파

저작시기 1997.01 |등록일 2011.03.11 | 최종수정일 2016.03.08 한글파일한글 (hwp) | 11페이지 | 가격 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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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신재효는 누구인가?
2. 신재효에 대한 계층적 이해
3.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
4. 신재효의 사설 작업의 한계

본문내용

판소리
+판소리의 형성 (17~18세기)
: 18세기를 전후하여 급격하게 변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발생한 판소리는 호남 지역(전라도)의 무속을 배경으로 발생한 예술이다.
호남 지역의 세습무 가운데 女巫를 "미지", 남무를 "산이"라고 하는 집단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여무가 굿을 담당하고 남무는 여무를 도와 여러 가지 잡일을 했으며 소득의 분배도 여무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남무가 굿에 참여하고 그 몫으로 돈을 받는 경우는 노래를 할 때뿐이었는데, 세습무 집안에서 남자로 태어나면 노래를 잘하는 것만이 잘 살 수 있는 길이었다. 이러한 호남 지역의 무속적 특징은 조선 후기 사회와 관련을 가지면서 판소리의 발생을 자극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무속의 사회적 신임은 퇴색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상행위가 활발해지고 부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습무 출신의 명창들이 무속이라는 제전적 속박을 떨쳐 버리고 소리판을 벌이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 당시의 판소리는 음악적인 부분이나 사설 부분에 있어서는 상당히 미숙한 상태였을 것이고, 연행방식 또한 돈을 주고받는 거래방식을 띠기보다는 적당한 물질적 보수를 받고 축제판이나 축하연 자리 등에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중 략>

2. 신재효에 대한 계층적 이해
: 그는 순조 11년(1812)에 태어나서 고종 21년 (1884)에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았던 당시 조선 왕조 중앙 권력의 강화 정책에 따라 지방의 토착 세력이 맡아 왔던 향리 직은 하급 관리직으로 한정된 신분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향리에게 일정한 급료를 지불하지 않았던 제도적 장치 때문에 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정을 저지르게 되고, 이러한 부정이 관행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후기에 이르면서 부정은 더욱 심화되어 향리들은 부정 부패를 상징하는 신분층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지배층의 가장자리에서 주로 농민으로 구성된 피지배층과 대립하는 사회 계층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하생략

참고 자료

최동현,『판소리란 무엇인가』,1994
최동현, 『판소리 연구』(민족 음악적 관점에서의 판소리 연구), 1991
『명창을 알면 판소리가 보인다』, 국립민속국악원.2000
서종문, 「판소리 운동가로서의 삶」『신재효 연구』,태학사, 1997.
정병헌, 「춘향가의 두 목소리」『신재효 연구』,태학사, 1997.
설중환, 『판소리사설연구』, 국학자료원, 1994.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전라북도 한국전통소리문화 http://www.koreamusi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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