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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천주교 박해사

저작시기 1997.01 |등록일 2011.02.14 한글파일한글 (hwp) | 12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연세대학교 리포트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박해시대의 천주교 발달

3. 을사 교난(추조 적발 사건)

4. 신해 교난
1) 조상 제사 문제
2) 진산 사건

5. 신유 교난
1)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세 교유의 순교
2) 신유 교난의 순교자 300여명

6. 정해 교난
1) 조선 교회 재건 운동
2) 기방의 교난

7. 기해 교난

8. 병오 교난

9. 병인 교난

10. 결론

본문내용

9. 병인 교난

고종 즉위 후 교회가 힛빛을 보이려 할 무렵에 러시아 사람들이 거듭 국경을 침범함으로써 마침내 병인 교난(1866)을 일으키게 하였다. 처음에 대원군은 교인들의 진언에 따라 서양 주교의 힘을 빌림으로써 러시아인의 침입을 막고자 하다가, 10여일 후에는 그 생각을 돌려 도리어 천주교를 박해하려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그해 10월 20일에 서울을 떠나 북겨으로 가던 동지사 이흥교 등이 그 도중에서 급히 거짓글을 정부에 보내어 ‘청나라에서는 그 나라에 있는 모든 서양인들을 죽이고 있다’라고 알려 왔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흉보가 서울에 전달된 것은 바로 그해 12월 중순의 일이었다. 이 흉보를 듣고 4명의 시임, 원임, 대신인 정원용, 김좌근, 조두순, 김병학 등이 글로써 대원군을 꾸짖어 말하기를, “서양인을 물리치시오, 그들과 친하게 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니, 서양 오랑채를 모두 죽이고 서학꾼을 모두 죽이시아.”라고 하니, 원래 변덕스러운 대원군은 마음을 돌려 천주교를 박해하게 되었다. 한편, 이때에 이르러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 것은 그가 그해 4월부터 재건하기 시작한 경복궁의 재원이 딸리게 되어 장 주교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재화를 빼앗아 쓰고자 한 데서 연유된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병인 교난도 구정을 전후하여 발단 하게 되었는데, 그 첫 희생자는 평양에서 발생하였다. 즉 평양 감사 정지용은 1865년 겨울에 두 교우를 잡아 가두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몰려온 1백여 명의 교우들이 또한 함께 갇히기를 자원함을 보고,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이들을 곧 놓아 준 일이 있었으나, 이듬해 1월 3일에는 다시 유정률 베드로, 우세영 알렉시오 등 네 교유를 잡아 다가 형문한 끝에, 배교를 선언한 3인을 풀어줌과 아울러 끝까지 신앙을 고백한 유정률만은 1백여명의 배교자들로 하여금 타살하게 하여, 그 시체를 대동강에 버리게 한 일이 있었다.

참고 자료

류홍렬(1976),『한국의 천주교』, 서울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안철구(1983),『이야기로 엮은 한국 천주교 200년』. 서울 : 세문사
윤민구(2009), 『103위 성인의 탄생 이야기』, 서울 : 푸른역사
한국사목연구소(1991), 『사목연구총서2-국사』, 서울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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