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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저작시기 2010.11 |등록일 2010.11.19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7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왜린전의 정세
-교린정책과 왜변
-일본의 국내정세
-조선의 국내정세와 군사준비 실태

왜란의 발발과 경과
-왜란의 발발
-의병의 봉기
-수군의 승첩
-명군의 참전과 전세의 변화
-조명군의 반격과 전국의 추이

해당 국사교과서 내용

목차

1. 왜란 전의 정세
1) 교린정책과 왜변
2) 일본의 국내정세
3) 조선의 국내정세와 군사준비 실태

2. 왜란의 발발과 경과
1) 왜란의 발발
2) 의병의 봉기
3) 수군의 승첩
4) 명군의 참전과 전세의 변화
5) 조·명군의 반격과 전국의 추이

본문내용

1) 교린정책과 왜변
조선왕조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은 사대(事對)와 교린(交麟)이었다.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교린이라 하여도 상국(上國)으로 자처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왜구의 약탈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르러 점차 진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왜구의 위협은 상존하였고 조선 초기 이후에도 간헐적인 왜구의 침공이 있었다. 계해약조(癸亥約條, 세종 25년)를 체결하여 대마도주의 제한적인 무역을 허락하는 회유책을 펴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강·온 양면정책은 중종 5년(1510) 4월에 이르러 3포에 거주하는 왜인들이 일으킨 삼포왜란으로 인해 파탄에 접어들게 되었다. 왜세는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곧 관군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조선조정은 삼포를 폐쇄하고 왜인과의 교통을 단절하였다. 대마도는 이로 인해 물자의 곤란을 받게 되자 일본정부를 통하여 국교 재개를 요청하였다. 이로써 임신약조가 체결되었는데 이는 왜인에 대하여 삼포왜란 전보다 더 많은 제약과 구속을 가한 것으로 왜란에 대한 징계와 제한의 성격을 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그간에 일본은 점차 강성해져 갔으며 사량왜변 후 조선은 일본국왕사 이외의 왜인의 입국을 거절하는 강경책을 썼다. 명종 10년에 발생한 을묘왜변은 삼포왜란보다 피해가 심각하였다. 이 왜변으로 조정에서는 왜구의 침략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지만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찾지 못했다. 일본 내부에서 전국시대에 돌입하게 되자 일본과의 정식외교는 일체 단절되었으며 소강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2) 일본의 국내정세
16 세기의 일본사회는 응인(應仁)·문명(文明)의 난(1467~1477) 이후 약 100여 년간 하극상의 동란기인 전국시대로 들어갔으며 전국대명(戰國大名)이라 불린 세력들이 등장하였다. 전국시대에는 여러 형태의 도시가 생겼으며 항구에는 무역항이 번성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포르투갈·스페인 등 서양세력의 동진에 따른 이들과의 무역과 서양문물의 전래로 조총의 보급으로 전술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는 등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천주교단의 예수회 전래도 일본사회에 변화를 불러 일으켰으며 이상과 같은 변화 속에서 전국시대의 통일은 직전신장에

참고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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