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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논문] 민족주의관점에서 본 19세기 독일 통일 배경과 전개과정

저작시기 2009.11 |등록일 2010.04.29 한글파일한글 (hwp) | 16페이지 | 가격 2,500원

소개글

19세기 독일의 통일에 관해 쓴 사학과 졸업논문입니다.
A+받은 졸업 논문.

목차

Ⅰ. 머리말

Ⅱ. 혁명에 의한 독일 통일 시도
1) 1848 혁명의 전개
2)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3) 혁명의 실패

Ⅲ. 독일 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1) 경제적 통합의 과정
2) 비스마르크의 국내 정책
3) 비스마르크의 대외 정책

Ⅳ. 독일 통일이 주는 역사적 의의
1) 독일통일 이후의 민족주의
2) 독일의 특수성

Ⅴ. 맺음말

Ⅵ.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머리말
독일 역사에 대해 우리가 떠올리는 일반적 이미지는 히틀러로 대표되는 강하고 군사적인 강대국의 모습이다. 그러나 자칫 독일이 원래부터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유럽 강대국 중 하나였을 거라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독일이 유럽 강대국으로서 자리매김을 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일찍부터 강력한 중앙정부에 의해 하나의 국가로서 통일성을 이룬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수많은 지방 세력으로 나뉘어있던 독일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단일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독일의 통일이 지체된 이유는 ①지리적으로 뚜렷한 경계가 없었고, 강력한 중심세력의 결여 ② 황제의 관심이 독일인이 사는 국토 밖에 있었으며, 통일된 독일이 아닌 세계 제국에 관심 ③다른 나라 경우 중앙정부가 강력하기 때문에 획일적인 종교정책 수행이 가능했지만, 독일은 같은 언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분열되었다는 점 등으로 분석해볼 수 있다. 16세기 중반 이후 신성로마제국민의 종교적 분열은 제국의 모든 제도에 영향을 미쳤고 주민의 생활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사회 분야에서 정체현상이 나타났다. 종교적 대립은 늘 새로운 갈등, 박해, 추방을 초래했으며 비록 17세기 초 신교지역에서 독일 애국주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지만 독일에서 국민형성은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고 오히려 퇴보하였다.
이처럼 중앙집권화 된 단일정부가 형성되지 못한 독일에서 범게르만적 기초 위에 민족감정 내지는 민족의식이 급속도로 진전된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세기 말 독일 민족의식이 향상된 이유는 영방이 작은 단위로 분열되어있었기 때문에 유럽에 있어서 독일의 지위가 무력하다는 현실을 자각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여러 영방 중에서도 가장 크고 고도로 중앙집권화하고 있던 프러시아(프로이센)의 민족감정이 독일 전역을 휩쓸었고 동시에 프러시아의 권위는 다른 영방을 압도하기에 이른다.
독일의 정치적 · 사회적 분위기는 정치적 통일에 대한 그들의 욕구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국민과 정부 사이에 강력한 일체감이 성립되었고, ‘국가’는 단순한 행정기구가 아니라 공동사회라고 하는 의식을 기초로 한 민족의지의 조직이라는 관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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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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