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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건릉

저작시기 2010.04 |등록일 2010.04.19 한글파일한글 (hwp) | 5페이지 | 가격 1,200원

소개글

융건릉에 대한 레포트입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차

Ⅰ. 융건릉 역사와 구조
1. 융릉
2. 건릉
Ⅱ. 융건릉에 대한 직접적 탐구
Ⅲ. 융건릉의 문화 예술적 가치
Ⅳ. 융건릉 보존실태와 제안
Ⅴ. 감상과 도면

본문내용

Ⅰ. 융건릉 역사와 구조
1. 융릉
융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1735-1762)와 그의 비인 경의왕후(1735-1815)홍씨가 묻힌 곳이다. 1749년(영조 25년)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하면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의해 영조의 미움을 사 영조 38년 (1762)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그후 영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고, 묘호를 수은묘라 하였다.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 (광무 3년)에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장조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 배봉산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아래에 있었는데 정조가 수원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이라고 하였고, 장조로 추존된 뒤 능호를 융릉으로 높였다. 경의왕후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로 1744년(영조 20년)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장조가 세상을 떠난 뒤 혜빈 정조 즉위년에 궁호를 혜경으로 올렸고, 뒤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Ⅴ. 감상과 도면
조선은 전제군주국가였으나 국왕이 실제 운용에 있어서는 왕권을 견제하는 세력이 많아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고 보기 어렵다. 법전으로 통치체제를 제도화하여 법전에 의거한 법치국가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신하들이 반대하는 정책을 독단적으로 펴기란 사실상 불가능 했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심해졌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이른바 당쟁이 나타났다. 서로 당을 만들어 정권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오늘날의 정당 정치와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쟁 자체는 오늘날의 인식처럼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서로 정권을 잡기 위해 견제하는 것은 정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 당쟁이 계속해서 건전하게 운영되었다면 조선은 보다 오래 동안 유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조선의 비극은 노론이 거의 100여 년간 정권을 잡았다는 데 있다. 100여 년간 깊이 뿌리내린 노론 세력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임금을 선택하는 상황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온갖 정치적 음모와 비리가 행해졌다. 정조 이후 순조부터는 하나의 당이 아닌 가문에서 정권을 좌지우지 하는 세도정치로까지 발전하게

참고 자료

문화재청 화성지구관리소 홈페이지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 그 여드레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푸른역사, 1998
이호일, 조선의 왕릉, 가람기획,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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