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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아편전쟁 이후~5.4운동 이전]중국 변법자강운동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평가

저작시기 2010.03 |등록일 2010.03.31 한글파일한글 (hwp) | 3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2010년 방통대 중어중문학과 4학년 중국현대사 과제입니다.

[아편전쟁 이후부터 5.4운동 이전까지 중국 현대 역사상 발생한 사건을 하나 선택하여 그에 대해 설명(A4용지 3~4매, 글자크기 10)하고, 자신의 느낌과 평가를 작성(A4용지 1매, 글자크기 10)하시오.]에 대해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정말 열심히 준비하였습니다. 좋은 점수 받으시길 바랍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무술개혁이라고 불리 우는 이른바 ‘백일천하’라 불리는 변법자강운동은 짧지만 강한 여운을 남겼다. 변법자강운동을 중국 근현대사라는 역사의 무대 위에서 ‘어떤 역할을 배정할 것인가’의 선택의 문제가 남아 있다. 먼저, 변법론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중국 정세를 살펴봐야 한다. 청은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면서 성장한 한인 관료층의 주도로 양무운동이 한창이었다. 중체서용의 비교적 온건한 양무운동은 근대적 무기와 기기를 도입하여 중국의 근대화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대만사건, 청프전쟁 그리고 청일전쟁의 계속적인 패배로 양무운동이 실패했음을 입증하였다. 청의 계속적인 패배는 기존의 중화주의와 동북아에서 패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중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양무운동을 주도하였던 이홍장은 이 시기에 외교를 담당하였고, 그의 외교는 굴욕적인 이른바 ‘양보외교’라고 불리 운다. 실망한 지식인층은 더 이상 양무운동이 유효하지 않으며, 양무운동의 실패요인으로 관독상판과 전쟁 패배의 책임을 비판하면서 조금 더 급진적인 변법론에 귀 기울이게 된다.
두 번째로 서태후로 대표되는 보수파로 그들은 여전히 정계의 실권을 거머쥐고 있었으며, 격변의 시기에 주체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하기에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고, 민들의 생활을 전혀 헤아려 주지 않았다.
세 번째로 일각에서 혁명론이 등장하였다. 혁명논의는 변법론보다 진일보하고 더 급진적인 사상으로 공화정체를 주장했으며, 낡아빠진 청조를 유지하여 국가를 보존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아직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은 후일 신해혁명을 담당하는 쑨원을 비롯한 혁명파의 맹아로 이때 등장 하였다. 아직은 청조에 충성하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이들의 사상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변법자강이 성공했다면 결국 신해혁명과 혁명의 아버지 쑨원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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