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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펠리니의 대하여 (그의 일대기와 사조적 의의 - 몇몇 작품들)

저작시기 2003.06 |등록일 2010.01.14 | 최종수정일 2014.08.07 한글파일한글 (hwp) | 6페이지 | 가격 2,000원

소개글

페데리코 펠리니의 대하여 (그의 일대기와 사조적 의의 - 몇몇 작품들)
영화감독 진정한 리얼리스트, 페데리코 펠리니

목차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 1920. 1. 23. - 1993. 10. 31.)
1.나는 삶에 대해서 고정된 생각을 갖고 싶지 않다. " - 페데리코 펠리니
2.어릿 광대 펠리니, 길에 서다
3.필름에 써내려 간 자서전들
4.진정한 리얼리스트, 페데리코 펠리니
5.페데리코 펠리니의 작품들

본문내용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 1920. 1. 23. - 1993. 10. 31.)

나는 삶에 대해서 고정된 생각을 갖고 싶지 않다. " - 페데리코 펠리니

예술이라는 것이 순전히 인간에 대한 것이라면 예술이 창조하는 인간형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 보려는 사람들의 행동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한 몇 편의 영화는 펠리니 감독의 <길 La Strada>와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Paris Texas> 였다. 물론 <길>의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잠 파노(안소니 퀸)`를 일컫는 말이다. 펠리니 감독의 영화를 본다는 일은 이제 먼지 쌓인 도서관에서 세월의 더께를 털어내고 고전을 꺼내 읽는 일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영화들은 자신의 환상에 충실한 작품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세월의 안개를 훌쩍 뛰어넘어 지금도 생생한 감각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의 영화는 분명 네오 리얼리즘이라는 거대한 숲에서 시작해 `펠리니`라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그가 만들어 낸 완전히 `펠리니적`이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어릿 광대 펠리니, 길에 서다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연상할 때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몇 가지 상징적인 아이콘들이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두 가지로 갈리게 된다. 그 중 하나는 첨단 유행 패션과 고대 로마 제국의 유적들, 맛좋은 피자와 풍부한 물산, 그리고 지중해의 태양이 상징하는 선진국 이미지와 다른 하나는 네오 리얼리즘 영화들이 만들어 낸 전후 이탈리아 뒷골목의 어두움과 그 안에서 살아나가는 이탈리아 서민들의 정서가 그것이다. 아마 펠리니가 태어나던 1920년의 이탈리아는 분명 후자쪽에 가까왔을 것이다. 이 해는 베르사이유 조약이 체결되던 해로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되기는 했으나 별로 이득을 얻지 못한 전쟁이었던 탓에 많은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막노동 일꾼이 되기 위해 떠나가는 이민선에 몸을 싣던 시기였다.
펠리니가 태어난 리미니는 이탈리아 중부의 에밀리아로마냐주의 작은 소읍으로 아드리아해와 인접해있었다. 1509년 이래 로마교황령이었으나, 1860년에 이르러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된 곳이었다. 그의 영화에서 때로 필요 이상으로 종교(가톨릭)적이라고 보이거나 개인적인 추억에 집착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그가 자라난 리미니의 쓸쓸한 아드리아해와 근세까지 교황령에 속했던 이런 종교적 환경 때문이기도 하다.(미야자키 하야오 <붉은 돼지>의 배경도 아드리아해였다. 펠리니의 영화에서 바다는 중요한 모티브이기도 하다. 영화 <길>은 바다에서 시작하여 바다에서 끝난다.)
젊은 시절의 그는 그림을 잘 그리는 청년이었지만 그리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태어난 리미니는 작은 소읍이기는 했지만 해안가에 있어 카니발과 서커스, 그리고 순회 보드빌 극단이 자주 공연을 벌였고, 어린 펠리니는 낮부터 밤까지 학교에 가지 않고 그 공연장에 앉아 있었다. 다니던 가톨릭계 학교를 뛰쳐나와 그는 서커스 단원이 되었고, 이후 만화가, 신문기자, 만평가, 작사자, 그리고 개그 작가로서 일한 페데리코 펠리니는 1939년에 영화대본의 공동작업자로서의 길에 들어섰다. 그에게 일생을 두고 영향을 준 대상 4가지를 꼽으라면 무엇보다 서커스와 가톨릭, 로베르토 롯셀리니(Roberto Rossellini), 그리고 줄리에타 마시나(Giulietta Massina)였을 것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이렇듯 서커스 무대가 주는 현란한 긴장과 무대에 한껏 매료된 시기였다. 그는 "만일 영화라는 것이 없었고 내가 로셀리니와 만나지 않았다면 또 서커스가 아직도 현대적인 흥행물이었다면 아마도 나는 큰 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커스야말로 기술, 정확성, 그리고 즉흥성의 혼합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인형극을 즐겼던 이 미래의 영화 감독은 동네 영화관에서 강한 인상을 받고는 여러 시간 동안 거울 앞에 앉아 볼에 연지를 칠하고 서커스를 보고 와서는 광대 분장을 해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또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그림 실력으로 영화배우들을 그려 전시함으로서 극장측으로부터 그 곳을 자유롭게 출입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은 터였다. 하지만 가톨릭계 학교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신에 대한 사랑보다는 통제와 억압이었고, 밝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진 그에게 우울한 죄의식을 심어주었다. 결국 그는 교권 반대주의자가 되었지만 그의 이런 행동들이 그가 반종교적인 인물이 되도록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단지 자신을 옭아매려는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했다.

참고 자료

세계영화사: 잭 C.엘리스. 변재란 옮김. 1998
영화예술: 데이빗 보드웰.주진숙 이용관 주진숙 옮김. 1997
영화 스타일의 역사: 데이빗 보드웰 김숙 안현신 최경주 옮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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