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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에 관한 고찰

저작시기 2010.01 |등록일 2010.01.05 한글파일한글 (hwp) | 10페이지 | 가격 2,000원

소개글

명나라에 관한 고찰

목차

●명나라
●역사
●정치
●사회 / 경제
●문화
●한반도와의 관계

본문내용

●문화
명의 문화정책은 처음에는 복고국수주의(復古國粹主義) ·몽골색 불식에 힘을 기울였으나 뒤에는 경제발달, 서민생활의 향상, 도시의 번영, 교육의 보급에 따라 대중적 색채가 짙어졌다. 또한 유럽의 과학사조가 들어와 그 영향도 받았다. 먼저 사상면에서는 몽골인에 압박을 받은 유학(儒學)의 전통적 지위를 회복하고자 영락제 때에는 송나라 주자학(朱子學)의 부흥에 힘써 송학(宋學)을 집대성해서 《성리대전(性理大全)》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의 주석서(注釋書)를 칙찬(勅撰)하였는데, 이것은 과거(科擧)의 참고서가 되어 사상통제적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중기에 왕수인(王守仁:陽明)이 송나라 육구연(陸九淵)의 학설을 계승하여 실천을 중시하는 인격주의의 이상철학(理想哲學)을 주창, 유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뒤 그 학설은 양명학(陽明學)으로서 크게 번져 명말에는 사상계를 주도하였다.
불교는 원대(元代)에 라마교(敎)가 성행하여 침체에 빠졌으나 명대에는 국가적 보호를 받아 대장경(大藏經)도 간행되었다. 뒤에 도교(道敎)가 보호를 받아 불교는 강력한 압력을 받았으나, 침잠(沈潛) 속에 사상적으로는 활기를 띠어 교의상(敎義上) 각 종파를 통합하려는 혼융불교(混融佛敎)가 주창되었으며 또한 유 ·불 ·도 3교의 조화설도 발달하였다. 도교도 크게 성행하여 《도장(道藏)》을 집성하였고, 가경제(嘉慶帝)의 열광적 신앙에 힘입어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미신적 형태로 민간에 보급되었다.
학문 숭상의 기풍도 짙어 성조(成祖) 때는 방대한 백과사전인 《영락대전(永樂大典》 등 많은 칙찬서(勅撰書)가 간행되고, 민간에서도 저장[浙江] 범씨(范氏)의 천일각(天一閣), 장쑤[江蘇] 모씨(毛氏)의 급고각(汲古閣)과 같은 대장서가(大藏書家)가 나와 역대의 정사(正史)가 합각(合刻)되어 남감본(南監本) ·북감본(北監本) ·급고각본(汲古閣本) 등이 간행되었다. 또한 《사기평림(史記評林)》 《한서평림(漢書評林)》 《십팔사략(十八史略)》 《당송팔대가문(唐宋八大家文)》 《당시선(唐詩選)》 등 계몽서도 유행되어 학문은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고, 《천하일통지(天下一統志)》 《광여도(廣輿圖)》 《직방지도(職方地圖)》 등 지리서와 각 지방지(地方志)도 많이 간행되었다.


●한반도와의 관계
약 1세기 동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온 고려 조정은 명이 건국을 선포한 1368년(공민왕 17) 이후에도 원의 잔존세력 때문에 친원(親元)·친명(親明) 양파로 갈려 확고한 외교정책을 펴지 못하고 그후 20년 동안 대명(對明) 관계는 혼미(昏迷)를 거듭하였다. 공민왕은 즉위 초에 원나라의 쇠퇴한 기미를 알고 자신의 몽골풍 머리(剃頭 髮)를 고치고, 1356년에는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의 오빠인 기철(奇轍) 등 원나라에 붙어 악행을 저지른 자들을 죽이고, 북방의 실지(失地) 일부를 찾았으며, 원의 연호를 폐지하는 등 진취적인 정책을 취하였으나 압력을 받아 다시 원의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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