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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김구와 우남이승만 비교분석

저작시기 2010.01 |등록일 2010.01.03 한글파일한글 (hwp) | 8페이지 | 가격 3,000원

소개글

1946년 초의 반탁운동이 결국 미군정에 의해 저지당한 상황에서 임정세력은 대열을 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결국 임정세력은 정당 창설에 소극적이던 기존의 자세를 바꾸어 한국독립당(한독당)을 창당했다.

임정세력은 1946년 4월 안재홍이 이끌던 국민당 등 몇 개의 우익 정당을 통합하여 한독당을 출범시켰다. 이것은 임정법통론이 좌익은 물론이고 우익 전체도 아우르지 못하는 일개 견해로 축소되었음을 의미했다.

한독당은 한민당과의 통합도 모색했으나 한민당이 응할 리 없었다.
임정세력은 미군정과의 관계 개선에도 부심했지만, 미군정은 한민당만을 편애하고 있었고 임정의 권위를 해체시켜 나갈 뿐이었다.

1946년 후반 좌우합작운동이 부상했는데, 이 사안에 대처하면서 한독당은 내부 갈등을 겪었다. 김구를 비롯한 임정세력은 대체로 임정법통론을 고수했지만, 안재홍 등 다른 그룹은 중도적 성향을 지녀 좌우합작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한독당의 공식적인 노선은 좌우합작운동 자체는 찬성하되, 김규식과 여운형이 이끌던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입법기구 수립에는 반대하는 축이었다.

목차

1) 임정법통론의 위축과 한독당 창당
2) 1947년 초 반탁운동과 김구의 좌절
3) 김구와 이승만의 마지막 합작 : 6.23 반탁 시위
4) 2차 미소공위의 결렬과 김구의 모색
5) 장덕수 암살 사건과 ‘반탁 동맹’의 파국
6) 결론

본문내용

1947년 1월 11일 하지가 미소공위의 재개를 위해 이북의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에게 보낸 서신이 공개되면서 다시금 반탁운동이 불붙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반탁운동은 이승만이 방미 외교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임정세력이 주도했다.

김구는 우익의 여러 연합체 조직들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창설하고 ‘유일한 입법기관’임을 천명하여 입법의원을 부정했다.
뒤이어 새로운 과도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선포하고 반탁 시위를 조직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지난 반탁운동과는 달리 이번에는 비협조적이었다.
이미 1946년부터 우익 내부간의 주도권 투쟁이 심화되어가고 있던 정국이었다.
이때의 반탁운동은 이승만이 없는 시기를 틈타 임정세력이 우익 내부의 주도권을 되찾고 임정 위주의 정부 수립을 기도하려 했던 성격이 강했다.
당연히 이승만과 한민당 측에서는 견제하고 나섰던 것이다.

미군정 역시 반탁운동의 주모자(즉 김구)를 체포하겠다고 을러대는 등 강력한 압박에 나섰다. 반탁운동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 예전 같지 않았다.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는 정국을 지켜보며, 대중은 미소공위를 통한 정부 수립이 꼭 반민족적인 성격만은 아니라는 점을 인지해나가고 있었다.

1947년 초 김구와 임정세력이 주도한 반탁운동은 ‘김구의 체면만 손상한’ 해프닝으로 끝났다.



백범은 누구보다도 길고 잔인하도록 순결하게 살다 간 위인이다.

김구와 이승만은 같은 시간에 머물렀으나 동시대를 살다간 위인들이 아니다.
백범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살다간 민족지도자였다면,
이승만은미소의 대립과 이데올로기적 혼란 그리고 냉정한 국제관계속에서
대한민국의 건국과 생존을 추구하던 현실적인 국가지도자였다.
이 두사람을 단순 비교한다는 것자체가 넌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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