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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의 생애와 문학관, 작품경향과 대표작품분석, 의의와 한계 - 발표자료

저작시기 2008.04 |등록일 2009.01.02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8페이지 | 가격 1,600원

소개글

채만식의 생애와 문학관, 작품경향과 대표작품분석, 의의와 한계에 대한 자료입니다
현대문학강독 강의시간에 발표자료로 썼습니다.

목차

1. 채만식의 생애
2. 약력 및 작품경향
3. 문학적 특성
4. 채만식만의 풍자적 특징
<논이야기> 작품 분석
3. 채만식 문학의 의의와 한계
4. 채만식의 문학사적 위치

본문내용

1. 채만식의 생애 장양수, <<채만식의 비동반자작가적 성격>>, 새얼어문학회, 1987
채만식은 1902년 전북 옥구군 잉피면 취산리에서 채규섭 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상당한 부농이었으나 1905년을 전후해 일제의 조선토지수탈 계략에 의해 경제적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채만식이 자란 고장은 금강과 만경강 사이의 평야 지대로서 양반적 유교 전통이 강한 지방이었는데 이곳에 일본의 토지 자본이 집중적으로 진출하여 봉건적 모순과 민족적 모순의 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교차하는 지점이 되었다. 이 시기에 채만식의 집안은 양반 선비도, 하층 빈민도 아니고 친일도 항일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놓여 있어 훗날 그의 문학 세계에서도 보여지듯이 소년기의 채만식은 자신의 고유한 계급적 관점을 지니지 못했다.
그는 1918년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중학교)에 입학하여 두 개의 큰 사건을 겪었는데, 31운동과 자신의 결혼이 그것이다. 그러나 31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추정되고 있으며 결혼 또한 그의 부모에 의한 강제적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하여 부인 은선흥 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도 훗날 김씨영이라는 신여성을 아내로 맞아 2남 1녀를 두게 된다. 1922년 중앙고보를 졸업한 채만식은 일본 와세다대학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에 따른 조선인 대학살로 인해 급히 귀국하고 만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미두에 의한 부친의 파산, 즉 앞으로 평생 동안 그를 놓치지 않고 따라다닐 경제적 곤궁이었다. 곤궁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지탱하고 단련하는 방식으로서 그가 발견한 것은 글쓰는 일이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다음 해 단편 <세길로>가 <조선문단>에 발표됨으로써 채만식은 문단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후 1936년 본격적으로 창작에만 전념키로 결심하기 전까지 동아일보를 비롯한 각 신문사를 전전하며 신문 기자로서 활동하는데, 동료들에 의하면 그는 매우 비타협적이고 결벽기가 있는 불편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1930년대 우리 문학은 항일민족해방전선의 범주에 있다고 보기 어려웠으며 소시민적 생활 문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 시기 채만식의 문학적 특징은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으나 식민지 체제의 본질에 관한 의문점을 항상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일제 말 친일문인의 대열에 끼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문학적 지향과도 맞지 않고 그의 개인적 성향과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전체주의에 굴복한 개인주의의 어쩔 수 없었던 상황과 고뇌, 그리고 오명은 이후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해방을 전후로 해서 그는 일체의 집단적 행동을 기피하고 해방을 또 다른 문제 제기로서 인식하고 `조선의 비명`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몸을 침식한 폐결핵과 가난은 1950년 6월 만 48세로 그의 일기를 마감하게 한다.
오늘날 비평가들에 의해 채만식은 문학의 본질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고 작가로서의 생명을 지킨 자로서 인정 받는 동시에, 한국의 지식인이 무엇을 괴로워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 약력 및 작품경향

참고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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