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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비정치화

저작시기 2009.10 |등록일 2009.12.22 한글파일한글 (hwp) | 13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한국교회의 비정치화문제를 1907 대부흥운동과 연결지어 정리해봤습니다.

목차

Ⅰ. 서론
Ⅱ. 한국의 시대적 요청과 기독교
Ⅲ. 결론
Ⅳ. 토론을 위한 주제

본문내용

Ⅰ. 서론
한국의 개신교는 100년여의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졌음에도 세계가 놀랄 만큼의 성장을 이루어 왔다. 많은 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이러한 괄목할만한 성장을 바라보며 그 원인을 찾기 위해 힘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구한말의 한국의 시대적 상황과 선교사들의 선교방법론, 1907년 대 부흥 운동, 민족적 비운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들이 이러한 성장의 중요한 요소임을 동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과 과정 속에서 끝없이 제기 되고 있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비정치화 노선과 민족주의적 노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한국교회의 성장과정에서 계속해서 제기 되었던 한국교회의 비정치화를 천명하였던 선교사 중심의 교회의 역사와 민족주의적 사명을 품고 국가의 비운에 정면으로 대응하였던 민족주의적 기독교 세력들의 사상과 활동, 그로 인한 양자 간의 갈등 그리고 교회성장에 있어서의 영향들을 사상과 시대적 흐름에 따라 살펴볼 것이다.

Ⅱ. 한국의 시대적 요청과 기독교

1. 시대적상황

조선 말기는 국가의 전반에 걸쳐 큰 혼란의 시대였다. 정치적으로는 반봉건, 반외세, 반제국주의의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었고 집권세력들은 무능과 부패로 인하여 민중들의 근대화와 새 시대를 대망하는 열망을 수용할 수 없었다. 더구나 점증되는 외세의 접근과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발발, 그리고 이 전쟁들을 승리한 일본의 점증적인 간섭이 있었고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한국의 지배 집권세력은 지도력을 잃고 와해되고 말았다. 경제적으로도 관료들의 수탈과 높은 세금, 강제 부역 등으로 피폐되어 갔고, 선진 유통체제와 자본력을 갖춘 외세에 의해 급속도로 시장이 잠식되어 갔다. 결국 곳곳에서 생계를 위한 도적이 발생하고, 조직적인 농민봉기도 일어났다.
종교적으로도 공허한 진공의 시기였다. 불교는 정신이 고갈된 채 형식만 남았고 유교는 무능과 무력감만 노출하였다. 천주교 역시도 박해로 말미암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었다. 이렇게 한국은 종교 신앙과 정신생활의 전례 없는 진공기를 맞게 된다. 민중들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새로운 힘의 대상을 찾는 절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때에 외형적인 종교형태는 없었지만 종교심은 깊이 뿌리 박혀 있었던 민중들에게 교회는 유일한 비상구로 보였던 것이다

참고 자료

<도서>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연세대출판부, 2007)
민경배, “교회와 민족”,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민경배, “한국 민족교회 형성사론”, (서울: 연세대출판부, 1974)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 기독교의 역사Ⅰ”.(서울: 기독교문사, 1988)
송길섭, “기독교 수용사 연구”,(서울: 두레시대, 1998)

<학위논문>
권종현, “1907년 대부흥운동에 관한 연구”. 전주대학교 선교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정진효,“한국교회에 있어서 비정치화의 경향에 대한 연구”. 계명대학교 대학원(석사학위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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