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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점수A

다시찾는 우리역사 - 한영우

저작시기 2009.05 |등록일 2009.06.28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47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다시찾는 우리역사(한영우) 요약집입니다.

역사, 한국사, 한국사회경제사 등의 수업을 들을때 이 책을 읽고 요약하는 과제가 많은데

그때 요긴하게 사용하실수 있습니다.

올린 안에 사진도 첨부해놓았습니다.
제가 올린 다른 자료는 텍스트 위주로만 있는 것도 있습니다.
(가격동일하니 취향에 맞게 이용하세요 ^^)

목차

제1편 고대 연맹국가 - 고조선과 열국
제1장 한국인의 기원
제2장 고조선과 열국의 등장

제2편 고대 귀족국가 - 삼국과 남북국
제1장 삼국의 성립과 발전
제2장 삼국의 사회와 문화
제3장 발해와 그 문화
제4장 후기신라의 사회와 문화

제3편 중세 귀족-관료국가 - 고려
제1장 후삼국과 고려의 건국
제2장 고려전기의 정치와 사회
제3장 거란과의 전쟁과 송과의 관계
제4장 고려전기의 문화
제5장 12세기 이후 고려사회의 동요
제6장 몽고와의 전쟁과 사대부의 성장

제4편 근세 관료국가 - 조선
제1장 조선왕조의 성립
제2장 통치체제의 재편성
제3장 조선초기의 경제발전
제4장 조선초기의 문화
제5장 사림의 성장과 그 문화
제6장 왜란과 호란
제7장 17~18세기의 왕조중흥
제8장 조선후기 문화의 중흥
제9장 19세기 전반 서울과 지방의 갈등

제5편 근대 산업국가 - 꿈과 좌절
제1장 문호개방과 개혁운동(1863~1894)
제2장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경장(1894)
제3장 근대국가-대한제국의 개혁과 좌절(1897~1910)
제4장 항일의병전쟁과 구국계몽운동
제5장 1910년대의 민족해방운동
제6장 1920년대 실력양성운동과 민족협동운동
제7장 1930~40년대초의 민족통일 전선운동

제6편 현대 민주국가 - 분단과 번영, 인간상실
제1장 해방과 민족분단(1945~1950)
제2장 한국전쟁과 전후복구(1950~1959)
제3장 4?19 혁명과 남북한의 변화(1960~70년대)
제4장 전두환, 노태우 정부와 북한의 변화(1980년대 이후)
제5장 김영삼의 `문민정부`(1993. 2~1998. 2)
제6장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1998. 2. 25~2003. 2. 24)
제7장 노무현의 `참여정부`(2003. 2. 25~)

본문내용

제 5편 근대 산업국가 - 꿈과 좌절

제 1장 문호개방과 개혁운동 (1863~1894)


1. 대원군의 개혁과 병인양요・신미양요

1) 대원군의 내정개혁
철종이 돌아가자 고종이 즉위했다. 당시 고종은 12세의 소년이었으므로 그의부친 이하응이 실권을 장악하고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하응은 광범위한 개혁을 단행했는데, 과감한 인재등용과 서원 철폐, 양반에게도 군포징수를 하였다. 또한 그는 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재건했는데 이를 위해 원납전 이라는 이름으로 기부금을 징수하고 당백전을 발행해 물가가 등귀하였으며, 토목공사에 많은 인력을 동원해 민원을 사는 등 부작용도 있었다. 또한 그는 비변사를 철폐하고 삼군부를 설치해 왕권을 강화했다.

2) 병인양요 (1866)와 신미양요 (1871)

병인양요
1866년 9월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신부 살해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의 체결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대원군은 이를 묵살하고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이에 그해 11월 11일에 프랑스군은 물러가면서 강화도 일대에 대한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는데 이를 ‘병인양요’라고 한다.
신미양요
미국은 1871년 무력으로 조선과의 통상을 트기위해 강화도를 공격했는데 이를 ‘신미양요’라고 한다. 이 또한 조선이 승리하자 대원군과 조야의 민심은 배외의식으로 충만되고 전국에 척화비가 세워졌다.


2. 고종의 개화정책과 세력균형정책
1) 고종의 개화정책과 통상정책 (1873~1886)
강력한 통상거부정책을 취해오던 대원군이 집권 10년만에 물러나고 고종과 명성황후 일족이 권력을 장악했다. 황후일족은 개화사상에 입각하여 외국과의 통상을 지지했으며 이들은 왕조의 기틀을 유지하면서 외국의 과학기술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정책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1880년에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개혁의 중심기관으로 삼았다. 이후 대외통상론은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며 김옥균, 홍영식, 김홍집, 서광범 등의 청년들에 의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하는 입헌군주제 혹은 서양식 공화정으로 나아가려는 급진성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모든 제도와 문화를 서양식으로 바꾸자는 ‘변법개화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중엽쯤 일본에서는 정한론이 일어나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는데 1875년 운요호를 강화도에 접근시켜 조선측의 발포를 유도한뒤 12개조에 달하는 통상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었는데 이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조약이었으나 치외법권을 허용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후 조・미수호통상조약도 체결되었으나 이 역시 불평등 조약이었다.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양과 맺은 것에 비하면 덜 불평등한 것이었다.

2) 개화정책에 대한 위정척사파의 반발
위정척사사상은 우리의 유교문화를 정(正)으로 수호하고 일본문화나 서양문화를 사(邪)로 규정하여 배척했다. 강화도 조약이 맺어질 무렵 최익현은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일본과의 조약을 반대했으며, 정부의 탄압으로 일시적 소강상태를 보였던 위정척사사상은 1881년 <조선책략>이 조선에 유포되자 다시 한번 비등하였다. 이에 영남만인소를 시발로 전국의 유생들이 <조선책략>을 비난하고 이를 들여온 김홍집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척사상소운동을 단호하게 억압했다. 위정척사사상은 저서적으로는 매우 애국적이고, 당시 서양과 일본의 근대문명이 지닌 침략성과 비도덕성을 정확하게 예견하였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 시대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참고 자료

다시찾는 우리역사 한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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