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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과 쇄국정치

저작시기 2008.01 |등록일 2009.06.05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6페이지 | 가격 2,000원

소개글

대원군이 내정에 있어서 엄청난 결단력과 추진력을 가진 정치가였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나 대원군의 외치에 있어서는 그동안 많은 비판이 있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대표되는 그의 대외정책이 조선의 근대화를 늦추어 일본의 식민지배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주장은 이미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그러나 대원군의 대외정책에서 나타난 잘못으로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졌다고 평가하는 의견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력시위로 문호를 개방함과 동시에 치외법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려는 서구세력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으로 현명한 처사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목차

1. 서론

2. 본론
- 대원군이 쇄국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1) 병인박해
(2) 병인양요

- 대원군의 부국강병 의지

3. 결론

본문내용

서론

1863년 철종(哲宗)이 대를 이을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실의 가장 웃어른인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 趙氏)가 흥선군 이하응(興宣君 李昰應)의 아들 명복을 다음 왕으로 지명하니 바로 조선 제 26대 왕인 고종(高宗)이다. 그의 아버지 흥선군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봉해졌고, 나이가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의 자리에 올라 국정을 이끌기 시작한다. 조선조 역사를 통틀어 대원군만큼 강력한 개혁을 실시한 정치가는 없었다. 이는 어쩌면 대원군이 집권한 시기가 조선조 500여년 가운데 가장 개혁을 필요로 했던 시기라는 반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원군이 실행했던 여러 가지 개혁 작업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서원철폐와 호포법, 그리고 경복궁 중건을 꼽을 수 있겠는데, 그 중 서원철폐와 호포법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명적인 조치였다. 이는 양반이라는 지배계급의 특권을 완전히 부정하는 작업으로 영조(英祖)나 정조(正祖)조차도 이루어내지 못한 업적이었다. 경복궁 중건 역시도 많은 원성이 있었지만 수도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서는 복원이 필요한 면이 있었다. 경복궁 중건은 숙종(肅宗) 등이 추진한 적이 있었지만 역시 대원군의 추진력이 미치고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대원군이 내정에 있어서 엄청난 결단력과 추진력을 가진 정치가였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나 대원군의 외치에 있어서는 그동안 많은 비판이 있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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