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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과 4·3사건의 비교

저작시기 2009.04 |등록일 2009.05.10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8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4·3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광주민주화 운동과 사후처리과정을 집중적으로 비교분석한다. 그리하여 4·3사건의 사후처리과정의 문제점과 한계점을 살펴보고 현시대의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와 방향을 조명해본다.

목차

Ⅰ. 광주민주화운동
1.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란?
2. 사후 처리
- 사후처리 과정

Ⅱ. 4 · 3사건
1. 4·3 사건이란?
2. 4.3사건 사후
1) 진실을 가로 막는 현실
2) 80년대 이후부터 현재 4ㆍ3사건 추진 현황

Ⅲ. 광주민주화 운동과의 사후 과정의 비교

Ⅳ. 결 론

본문내용

Ⅰ. 광주민주화운동

1.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란?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시해됨으로써(79. 10. 26) 대통령 대행체제가 되고 한 동안 정국이 불안정하였다. 이러한 시기를 틈타 신군부세력(전두환, 노태우 등)이 제2군사 쿠데타를 일으켜(12·12 사태), 순식간에 무력으로 군부를 장악하고 정치권을 장악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다음, 당시 분출되고 있던 전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민주화운동세력과 야당의 정적을 제거해야 했는데 그 제물이 광주였다.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온 곳이며 야당의 정적 중에서 가장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있던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 전라도 광주였던 것이다.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두환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단행하여 계엄사령부는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어 계엄군은 광주를 장악하여 전대미문의 대 학살을 단행하였고, 김대중, 김종필 등 26명의 정치인을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시키는 등 정치적 탄압을 감행했다.

2. 사후 처리
5·18 광주 학생-시민운동에서의 희생은 1988년 제6공화국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바에 의하면, 사망 191명, 부상 852명이었다. (정부 집계에 의한 것이나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2,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요한 것은 5·18광주민중항쟁이 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되어 `5·18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었다는 데에 있다. 4.3사건과는 정부군이 일반 민중을 무자비 학살 했다는 것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이 사건이 어떠한 과정에 의해 인식이 높아지고 잘 갖춰진 현재의 체계를 이루게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1) 사후처리 과정
① 홍보활동
한국의 언론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이후 계엄군으로부터 일간신문 방송, 잡지, 모든 출판물 및 언론매체는 보도검열을 받기 시작해 새로운 기사를 내 보낼 때마다 검열을 받아야만 했다. 4.3사건에서도 제주도 전 지역이 공산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에 진압이 필수적 이었다는 잘못된 보도와 마찬가지로 광주민주화운동도 계엄사령부가 광주를 ‘폭도의 도시로’ 고착화 시켜 광주사태로 언급했다.
항쟁기간동안 보도검열로 인해 언론매체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유인물, 방송, 대자보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세력의 홍보활동은 활발히 이루어졌다.

참고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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