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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기녀시조

저작시기 2007.11 | 등록일 2008.05.31 한글파일 한컴오피스 (hwp) | 17페이지 | 가격 1,800원

소개글

기녀시조에 대해 연구한 리포트 입니다.

목차

I. 서론
1. 기녀시조의 형성
2. 연구사 검토
Ⅱ. 본론
1. 기녀시조의 주제별 분류와 작품 분석
2. 기녀시조의 특징
3. 기녀시조의 지도방안
Ⅲ. 결론

본문내용

기녀에 대한 연원을 고찰할 수 있는 자료가 별로 없으나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첫째로, 신라 진흥왕 때 화랑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원화에서 생겼다는 설이 있다. 이인화의『파한집』에 실린 김유신의 일화에 의하면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말에 올라탔는데 다시는 찾지 않기로 맹세한 기생집으로 말이 저절로 감에 크게 깨닫고 말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일화로 봐서 최소한 신라 때 부터 기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고 개성에 도읍을 정할 무렵 백제의 유민 중에 수척이라는 족속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이들을 노비로 지방 각 읍에 예속시켰으며, 이 중에 얼굴이 고운 여자에게 가무를 배우게 하니 이것이 그 기원 이라고 하여 기녀제도가 고려 때부터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기녀는 고려에 들어와 노비의 수적 증가와 함께 더욱 세분화되고 공식화되었다. 노비안검법의 실시로 많은 노예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그래도 고려시대에는 공노비 사노비 할 것 없이 수많은 노비들이 있었다. 중앙의 관료제도가 정착되자 개인 소유의 사노비들이 국가 소유로 귀속되면서 이 와중에 국가에 소속된 기녀, 즉 관기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고려시대 관기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들이 관아의 관비로, 또는 여악을 담당한 가척이나 무척의 형태로 연회에 나가 활동했음은 분명하다
고려의 관기제도는 그대로 조선으로 이어졌다. 조선왕조는 유교 윤리를 내세워 이룩된 사회였으나 모순되게도, 기녀를 없애기보다는 더욱 세분화하고 조직화했다.
분화된 기녀의 기능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여악을 담당하는 기녀이다. 대개 신라나 고려시대에 기녀를 둔 것은 여악 때문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기녀는 각 지방마다 뽑혀 올려 졌는데 장악원(掌樂院:궁중의 음악과 무용을 맡아보던 관청)에 소속되어 노래와 춤을 교육받았고, 이후에는 궁중에서 주관하는 여러 잔치에 동원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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