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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영유권 분쟁

저작시기 2005.11 |등록일 2008.03.28 | 최종수정일 2014.10.13 한글파일한글 (hwp) | 12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과 더불어 간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조선 후기 이래 간도는 어떤 상태에 있었으며, 대한제국 시절 청과의 국경회담은 어떻게 결렬되었으며, 일제 식민지 시기 일제와 청 사이의 간도 협약은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체결되었는지, 그리고 해방 이후 중국과 북한 사이의 국경 조약은 어떠한 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목차

간도는 누구의 땅인가?
1. 간도의 위치와 역사
2. 조선과 간도
1) 누구도 살지 않은 땅 간도
2) 백두산정계비와 간도
3) 유럽의 지도와 간도
4) 기회와 희망의 땅 간도
3. 한·중간 간도 영유권 교섭
1) 을유감계(乙酉勘界) 담판
2) 정해감계(丁亥勘界) 담판
4. 조선과 중국의 대 간도 정책
1) 중국의 간도 정책
2) 조선의 간도 정책
5. 간도 문제의 국제 관계
1) 러시아와 간도
2) 일본과 간도
6. 일본의 간도 진출
1) 일본의 개입과 간도구상
2) 통감부 임시 간도 파출소 설치
7. 간도 영유권을 둘러싼 중·일 간의 외교 교섭
1) 일본의 간도 영유권 주장
2) 일본의 외교적 위기와 간도 영유권 포기
3) 간도 영유권 포기와 한일합방
4) 간도협약의 내용과 간도
8. 간도협약의 효력 문제
1) 을사보호조약과 간도협약
2) 마지막 남은 제국주의 시대의 흔적
3) 북한과 간도 영유권
9. 에필로그 - 대한민국 헌법 제3조와 영토 문제

본문내용

2) 백두산정계비와 간도
1712년(조선 숙종38년, 청국 강희51년) 중국은 조선과의 국경을 명확히 할 필요를 느끼고, 오라(길림) 총관 목극등을 파견하여 조선과 청의 변경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목극등은 답사 결과에 기초하여 1712년 5월 15일 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표하는 비석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백두산) 정계비이다. 답사과정과 정계비 건립 과정은, 접반사 박권이 동행을 거부당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목극등의 일방적인 주도로 진행되었으며, 조선의 의사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백두산 정계비는 천지 남동쪽 4킬로미터, 해발2200미터 토문강과 압록강의 분수령 위에 세워졌다. 비문의 본문은, ‘대청국 오라총관 목극등은 황제의 명을 받아 변경을 조사하여 여기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니, 서쪽으로는 압록(강)이고 동쪽으로는 토문(강)이다. 하여 강이 나누어지는 고개 위 돌에 새겨 기록한다’로 되어 있다. (참고로 백두산 정계비는 만주사변 직전인 1931년에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비석의 기록과 탁본, 사진 등이 여러 나라에 남아 있어 역사적 기록으로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토문강과 압록강의 분수령에 비석을 세웠다고는 하나 바로 강원이 있는 곳은 아니다. 토문강의 강원은 비석으로부터 25리나 떨어져 있어 목책을 세우거나 돌과 흙을 쌓아서 표식을 했다. 그래서 정계비에서 토문강 물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까지 아주 주도면밀하게 인위적으로 표식을 만들어 양국의 국경을 표했던 것이다. 이는 장래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목극등의 요구로 조선이 축조한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중국에 의해 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압록강과 토문강으로 정해졌으며, 그것을 표시하기 위해 두 강이 갈라지는 지점에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과 중국 사이에 문서화된 최초의 국경 조약이다. 이 비문에 의하면, 압록강 - 정계비 - 토퇴, 석퇴 - 토문강이 조선과 중국의 국경이며, 그 이남은 전부 조선의 영토라는 의미이다.
현재까지 한·중 양국 간에 미해결의 국경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 비문의 토문이라는 두 글자이다.

참고 자료

이성환 <간도는 누구의 땅인가>, 2004, 살림
대구광역시 교육청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역사교욱의 방향 모색>,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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