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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수원화성의 관계

저작시기 2003.05 |등록일 2008.03.21 한글파일한글 (hwp) | 8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정조가 왜 수원 화성을 건설할수 밖에 없었는지를 규명하는 논문형식 리포트

목차

서언
I. 정조의 삶과 그의 정치인식
1) 세손시절의 상황
2) 집권초기의 상황
3) ‘성왕론’ ; 정조의 Ideology
II. 정조의 경장과 화성의 역할
1) 정조시대 경장의 흐름
2) 군사 분야의 경장과 화성
결론

본문내용

서언

이번 답사지 가운데 가장 인상깊었고 많은 시간을 소요하면서 답사에 임했던 곳은 바로 수원의 화성이었다. 거대한 수원의 도심 중앙을 감싸고 있는 화성의 성곽을 통해서 과거 번성했던 당시 화성의 모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화성은 조선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정조가 철저한 계획 하에 조성한 계획신도시이다. 그러한 철저한 계획 하에 설립된 도시이기에 아름답고 웅장한 성곽의 짜임새와 우리나라 유일의 완전한 성곽구조를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조는 왜 화성이 조성되기 이전에 한낱 촌구석에 지나지 않았던 수원에 계획적으로 거대한 도시를 조성한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필자는 정조가 자신의 치세 중에 내세웠던 ‘성왕론’과 정당성 확보, 정조의 개혁의 한 틀에서 그 답을 제시하려고 한다. 필자는 먼저 정조가 세손시절, 집권초기의 삶과 그 정치상황 속에서 느끼고 깨달은 정치 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것이 종합되어 만들어낸 새로운 정치 이데올로기인 ‘성왕론’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 다음으로 ‘경장’으로 일컬어지는 정조의 개혁과 그 개혁 내에서 화성의 역할을 분석하는 과정으로 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한다.


I. 정조의 삶과 그의 정치인식

1) 세손시절의 상황

정조는 젊은 나이에 뒤주 속에서 생을 마친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대리청정으로 영조로부터 생생하게 탕평정치를 배우고 있었던 사도세자는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영조 39년(1762)에 뒤주에 갇혀 죽고 마는데 이를 일러 ‘임오화변’이라고 한다. 임오화변은 조선왕조사상 국왕과 왕위계승권자 사이에서 일어난 최악의 사태에 해당된다. 임오화변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는 학설에는 크게 ①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차이와 갈등을 강조하는 ‘정신병리학적 접근’과 ②영조시대의 정치상황 및 세력관계를 중시하는 ‘정치구조적 접근’ ③사도세자의 평안도 여행을 증거로 사도세자가 영조에 대한 반역을 꿈꾸었고 이를 예방함과 동시에 사도세자의 도덕성을 이유로 뒤주에 죽이게 함으로서 영조 자신의 교화군주로서의 이미지를 지키려했다는 사도세자 ‘쿠데타 모의설’이 있지만 무엇이 확실한 이유인지 확실치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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