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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회와사상] 혜강 최한기의 사상

저작시기 2007.12 |등록일 2008.03.21 한글파일한글 (hwp) | 8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혜강 최한기의 사상에 관한 보고서자료입니다.

목차

1. 생애
2. 사상적 배경
3. 기학(氣學)
(1)신기설
(2)추측설
4. 자연관
5. 인간관
6. 정치관
7. 교육관
(1)경험적 교육관
(2)진보적 교육관
(3)실학적 교육관
8. 경제관(상업관)
(1)상업의 중요성
(2)대외무역-개국통상론
(3)상인의 역할

본문내용

1. 최한기의 생애
최한기는 1803년 경기도 개성에서 최치현(崔致鉉)과 청주 한씨(淸州 韓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字)는 지로(芝老)이고, 호(號)는 젊은 시절부터 패동(敗洞)과 혜강(惠岡 또는 惠崗)을 즐겨 사용했고, 만년에 당호(堂號)로는 기화당(氣和堂)과 명남루(明南樓)를 사용했다. 그의 생부 치현은 시(詩)로 이름이 났지만, 28세로 요절했다. 양부(養父) 최광현(崔光鉉)은 1800년 무과에 급제하여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고 한다. 최한기는 어린 시절에 생부와 양부로부터 전통적인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825년 23세 때 생원시에 합격한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유학 공부에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일생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교(敎)와 학(學)을 평생 종사해야 할 일로 생각하고 일생을 저술을 통한 학문 활동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는 70세 까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서울에 거주하면서 동서고금의 책을 구입하여 연구에 몰두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저서『인정(仁政)』에서 자신의 학문편력에 대해 “스승과 친구를 찾아 방문한 것은 천리를 멀다 하지 않았고, 서책을 연구하는 데에는 천금을 아끼지 않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1836년 34세 때에는 중국 북경에서 자신의 대표적 저작 가운데 하나인『기측체의(氣測體義)』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 진무사(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의 부탁으로 자문에 응했고, 70세인 1872년에는 아들 병대(柄大)가 시종직(侍從職)에 있었던 관계로 나라의 추은(推恩)을 입어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강화도 조약으로 타율적인 개항이 이루어지고 난 이듬해(1877년), 혜강은 영면하여 개성 동면(東面) 적전리(籍田里)의 선영에 돌아가 묻혔다.

2. 최한기의 사상적 배경
18세기 후반기가 실학이 한창 꽃피우던 시기라면, 19세기에 들어와 그 중기까지는 실학이 열매를 맺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이 저술에 몰두하던 유배 기간이 바로 19세기 전반기에 속하며, 실학의 최후 거봉인 최한기가

참고 자료

• 황경숙,『혜강 최한기 사상의 근대적 성격』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 역사 제47권, 1995
• 임민혁 ,『혜강 최한기 사상의 현대적 조명』한국행정학회, 2003년도 동계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003
• 김아리,『실학산책』서해문집, 1995
• 이동준 외,『한국실학사상사』, 한국철학사연구회, 2000
• 최영진 외,『최한기의 철학과 사상』, 철학과현실사, 2000
• 한영조 외,『혜강 최한기』, 청계, 2000
• 김교빈 외,『함께 읽는 동양철학』, 지식의 날개, 2006
• 신해순, 『최한기의 상업관』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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