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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의 갑신정변과 시대적 상황

저작시기 2008.02 |등록일 2008.02.26 한글파일한글 (hwp) | 26페이지 | 가격 3,010원 (30%↓) 4,300원

소개글

김옥균의 갑신정변과 시대적 상황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잘 언급되어 있으니 잘 참고하시어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목차

1. 김옥균의 생애와 삶
1) 생애
2) 개화 사상에 눈을 뜨다.
3) 김옥균의 사상에 영향을 준 사람들
(1) 박규수
(2) 유대치(劉大致)
(3) 역관 오경석(吳慶錫)
(4)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仁)

2. 구한말의 시대적 상황
1) 청국을 모델로 한 양무론적 개혁론
2) 외국의 근대문물에 대한 이해와 수용
3) 개화파 내부의 분열
4) 국가의 발전단계에 맞게 적용
5) 국가의 발전단계에 맞게 적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함
6) 청으로부터 정치 문화적으로 독립을 주장함
7) 김옥균이 쓴 『갑신일록』의 14개조
8) 실무적 관료형의 개혁론자들
9) 동학농민전쟁
10) 1896년 독립협회가 수립
11) 정권의 담당자들 광무개혁을 추진함
12) 각 정치세력의 특징

3. 김옥균의 갑신정변
1) 일본 시찰과 임오군란(壬午軍亂) 발생
2) 수신사 파견과 개화파의 좌절
3) 일본의 배신과 차관 도입 실패
4) 폭풍 전야
5) 무리한 정변 강행
6) 삼일천하
7) 고통스러운 망명
8) 연이은 자객과 암살
9) 김옥균 암살
10) 홍종우는 김옥균을 죽였을까?

4. 흥선대원군과 김옥균 비교

5.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
1) 너무 성급하게 추진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2) 왕실, 백성, 어느곳으로도 지지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3) 일본의 야욕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4) 개화당의 세력 기반이 약했다는 점이다.

6. 갑신정변의 의의

본문내용

2) 개화 사상에 눈을 뜨다.
김옥균은 철종(哲宗) 재위 2년(서기 1851년)에 충남 공주에서 호군 김병태(金炳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옥균(玉均)이라는 이름은 그의 얼굴이 백옥 같이 곱고 희다고 해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김옥균은 여섯살 때 5촌 당숙인 좌찬성 김병기(金炳冀)의 양자로 들어갔다. 원래 맏아들은 양자로 보내지 않는데, 당시 김병기가 집안에서 가장 권세가 있었기 때문에 총명한 그의 장래를 위해 아버지가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열한살 되던 해에 양아버지 김병기가 강릉부사로 부임하게 되어 그곳의 송담서원(松潭書院)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은 김옥균은 열여섯살 때 중앙 정계로 전임하는 양아버지를 따라 한성으로 올라오면서 더욱 학문에 정진하여 고종(高宗) 재위 9년(서기 1872년)에 스물두살의 나이로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김옥균은 과거에 응시하기 한두해 전쯤부터 이미 서울 북쪽에 있는 양반 거주 지역인 북촌(北村)에 드나들던 한의원 유대치(劉大致)를 통해 개화 사상을 접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급제하던 해에 성균관 전적이라는 관직에 진출해서 이듬해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민씨 세력과 유림들의 연합공격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다. 대원군은 고종이 등극하던 1863년부터 10년 동안 강력한 통치권자로 군림하였다. 외척의 폐단을 극도로 경계하여 몰락한 가문에서 며느리를 들였으나, 결국 그에 의하여 권력의 정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대원군이 실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동부승지 최익현(崔益鉉)의 탄핵 상소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10년 동안의 강권 통치로 인하여 반대 세력이 많아진 것과 야심 많은 고종의 왕후 민씨의 권력욕이 큰 몫을 차지했다. 대원군이 물러나자 정권은 민씨 일파의 독무대가 되었고, 사회적 악폐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특히 민씨 일파는 자신들의 세력 확장과 부귀 영화를 위해 몰지각한 행동까지 불사하여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놓고 말았다. 이미 대원군의 극심한 쇄국정책(鎖國政策)에 의하여 새 시대로 나갈 기회를 놓친 조선 왕국은 민씨 일파에 의해 완전히 퇴행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이재석 외, 『한국정치사상사』(집문당,2002)
-한국철학사연구회,『한국철학사상사』(한울,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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