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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의 생애와 활동

저작시기 2006.06 |등록일 2008.02.24 한글파일한글 (hwp) | 7페이지 | 가격 3,000원

소개글

윤치호의 생아와 활동 그리고 평가에 대한 글입니다.


한국 근대사에서 좌옹 윤치호(1865~1945)의 이름은 영예와 치욕으로 얼룩져 있다. 개화사상가, 기독감리교계 의 거두였던 그는 일제 말 전시단체 등에서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노골적인 친일행각으로 오점을 찍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여느 친일파처럼 단순히 재단할 정도로 녹록한 인물은 결코 아니다. 친일·민족진영 사이를 끊임없이 서성거린 회색인의 삶을 살았고, 사후 가계가 윤보선 전 대 통령과 윤일선 전 서울대 총장을 배출하며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친 명문가로 남았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윤치호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그의 활동과 평가 등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목차

들어가며
본론
1. 윤치호의 연대기적 서술
2.그의 사상을 보여주는 단면들(일화)
3. 현재적 평가

본문내용

들어가며
한국 근대사에서 좌옹 윤치호(1865~1945)의 이름은 영예와 치욕으로 얼룩져 있다. 개화사상가, 기독감리교계 의 거두였던 그는 일제 말 전시단체 등에서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노골적인 친일행각으로 오점을 찍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여느 친일파처럼 단순히 재단할 정도로 녹록한 인물은 결코 아니다. 친일·민족진영 사이를 끊임없이 서 성거린 회색인의 삶을 살았고, 사후 가계가 윤보선 전 대 통령과 윤일선 전 서울대 총장을 배출하며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친 명문가로 남았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윤치호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그의 활동과 평가 등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본론
1. 윤치호의 연대기적 서술
윤치호는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 창설의 주역 윤웅렬(尹雄烈. 1840∼1911년)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평(海平). 그의 부친은 무관이었지만 일찍 개화에 눈뜬 사람으로 그의 진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무과에 장원급제한 후 무관으로 급성장한 부친 윤웅렬이 아들 치호가 문과에 급제대 문관으로 입신양명하는 것을 보고 싶어 열성적으로 아들의 `조기교육`에 매진한 덕분이었다. 윤웅렬은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유신 이후 부국강병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일본의 상황을 직접목격하고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후, 1881년 아들 치호를 조사 시찰단(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는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딸려 보내 일본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했다. 다시 말해서 윤치호는 `조기유학`을 떠난 셈이다. 당시 나이는 17세, 일행 62명 중 막내였다. 3개월간의 시찰을 마친 후 그는 귀국치 않고 유길준(兪吉濬) 등과 함께 일본에 남아 신학문을 공부하였는데 이들이 최초의 일본유학생이 된다. 이 시절 그는 김옥균(金玉均) 등 국내 개화파 인사는 물론 일본인 개화파인사, 재일 외국인 외교관들과도 교류를 쌓아가면서 국제정세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2년간의 일본생활은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 슬프다. 조선의 현상이여, 남의 노예보다 더 심한 처지에 있으면서 어찌 진작(振作)하려 하지 않는가.” 당시 그의 눈에 비친 조국의 현실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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