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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그리고 천도교는 무엇을 했나

저작시기 2008.02 |등록일 2008.02.20 한글파일한글 (hwp) | 10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동학과 천도교의 관계.
동학의 뒤안길.

목차

동학, 그리고 천도교는 무엇을 했나?
1. 천도교가 걸어온 길
2. 천도교, 근대의 옷을 입은 동학
3. 천도교의 민족운동
4. 새로운 생활양식으로서의 문명 개벽
<동학은 오늘날 무슨 말을 전하는가?>
1. 우리 학문으로서의 가능성
2. 생명과 문명을 치유하는 길

본문내용

1. 천도교가 걸어온 길
그 당시 사람들은 경제적 궁핍, 수탈과 사회적 차별, 박해 속에서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유교의 권위와 통제능력상실에 따른 가치 질서의 붕괴로 인한 일종의 정신적인 방황 상태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학은 ‘천도교’ 라는 현재까지 동학을 계승한 거의 유일한 종교집단을 낳았습니다. 1905년 동학에서 이름을 바꾼 이 천도교는 1910년대에 급속히 성장하여 한때 교인 수가 300만에 달할 정도로 조선 제일의 종단이었습니다. 천도교는 민족운동에도 가장 앞장섰었습니다. 동학혁명은 물론이고 1904년의 갑진개화운동, 그리고 3 ․ 1 운동도 사실은 천도교가 주도하여 일어난 거사였습니다. 지금은 3 ․ 1절 하면 유관순을 상징인물로 떠올리지만 3 ․ 1운동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의암 손병희에 의해서 철저하게 기획 추진되었고 모든 자금도 천도교에서 충당했습니다. 실제로 천도교는 3 ․ 1 운동의 여파로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의암 손병희는 이때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1922년 결국 병사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3 ․ 1운동에서 천도교의 역할은 지나치게 과소평가되고 있습니다.
3 ․ 1 운동 직후 천도교 지도부의 대거 투옥으로 공백이 생긴 천도교는 신교육을 받은 젊은 엘리트 청년들이 주도해 나갔습니다. 1920년대 『개벽』지를 중심으로 한 신문화운동은 출판은 물론 교육, 어린이, 여성, 농민, 노동자 운동을 선도했습니다. 특히 어린이운동은 해월의 ‘사인여천’ 사상을 바탕으로 김기전, 방정환(의암의 사위)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청년들에 의해 추진되었습니다. 그 당시 천도교 청년회의 운동은 1920~1930년대 민족운동 진영의 중요한 계파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문명개화에 지나치게 마음이 기울여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계몽을 통한 해답을 모색한 그들의 고민과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고 자료

※참고자료

김경재, <수운의 시천주 체험과 동학의 신관>, 《동학연구》제4집(한국동학학회, 1999) ; <종교적 입장에서 본 현도 100년의 천도교>, 《동학학보》제10권 제1호(동학학회, 2006)
김용옥,《동경대전 1―도올심득》(통나무, 2004)
김지하, 《동학이야기》(솔, 1994) ; 《생명학》(전2권)(화남, 2003)
신일철, 《동학사상의 이해》(사회비평사, 1995)
오문환, 《천지를 삼킨 물고기》(모시는사람들, 2005) ; 《다시개벽의 심학》(모시는사람들, 2006)
윤노빈, 《신생철학》(학민사, 2003)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모시는사람들, 2004)
표영삼, 《동학 1 ― 수운의 삶과 생각》(통나무, 2004) ; 《동학2 ― 해월의 고난 역정》(통나무, 2005)
황선희, 《한국 근대사상과 민족운동 1 ― 동학 ․ 천도교편》(혜안,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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