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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 前의 朝․日間의 思想交流

저작시기 2008.02 |등록일 2008.02.10 한글파일한글 (hwp) | 9페이지 | 가격 2,000원

소개글

壬辰倭亂 前의 朝․日間의 思想交流
- 沙也可 金忠善의 生涯를 中心으로

목차

Ⅰ. 序論

ⅰ. 임진왜란을 준비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ⅱ. 임진왜란 전의 문물교류 상황

Ⅱ. 本論
ⅰ. 조선 전기의 사절의 왕래와 문물교류
1. 조선과 일본의 사절
1) 조선 측의 사절
2) 일본 측의 사절
2. 문물의 교류
ⅱ. 사야가 김충선이란 누구인가?
ⅲ. 김충선이 항복한 까닭은?

Ⅲ. 結論 - 김충선을 통해본 한일 사상의 교류

* 참고문헌(參考文獻)

본문내용

1592년, 조선과 일본은 7년에 걸쳐 격렬한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으로 인해 그 당시 조선과 일본 각 국은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은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분기점이 되었고, 일본에서는 강력했던 히데요시 가문이 멸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어남으로 인해 막부세력의 교체를 일으켜온 전쟁이 되었다.
그 격렬했던 전쟁 중에서도 주목할 점은 항왜, 즉 조선에게 항복한 일본 군사들일 것이다. 그 군사들 가운데서도 필자의 눈길을 끄는 사람은 본명이 沙也可인 김충선이라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출병시킨 부대의 오른손이었다. 이런 인물이 왜 조선에 투항하였고, 이 인물이 투항하게 되는데 한․일간의 사상적 교류가 어떤 원인을 펼치는지 간단하게 서술하겠다.

ⅰ. 임진왜란을 준비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의 상황
조선왕조의 일본의 대한 전통적인 외교정책은 교린정책(交隣政策)이었다. 이 교린정책은 주로 왜구를 박기위한 회유적인 평화주의에 입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이 적극적으로 교섭하여 오지 않는 한 조선왕조는 일본과 외교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귀찮은 존재로 여겼다. 이러한 관계는 세종 때 삼포개항 이후 계속되었고, 특히 양국의 외교관계가 주로 대마도 宗氏를 중계로 하여 전개되어 조선이 종씨에게 세곡미를 하사하고 무역의 특혜를 인정한 관계에서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를 교린이라 하여도 상국으로서 자처하였다. 결국 조선은 일본에 대한 외교는 고식적인 평화를 유지하고 견제하는 정책 하에 이루어졌으며 경제 문화적으로 하등의 필요성이 없는 마지못한 외교였다. 그러므로 조선은 일본의 침략이나 외교적 요청이 없는 한 그들의 국내정세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에 의하여 전국시대가 평정되어 갔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이를 계승하여 국내통일이 이루어지자 조선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참고 자료

○하세가와 쓰토무 著, 조여주 譯, 『귀화한 침략병』, 현대문학, 1996.
○이진희․강제언 共著, 김익한․김동명 共譯, 『한일교류사-새로운 이웃나라 관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학고재, 1998.
○조항래․하우봉․손승희 編, 『講座 韓日關係史』, 현음사, 1994.
○니토베 이나조 著, 양경미 譯,『사무라이-무사도를 통해 본 일본 정신의 뿌리와 그 정체성』, 생각의 나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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